노박 조코비치(24·세르비아, 세계 2위)가 제 125회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에서 디펜딩 챔피언이자 몇 시간 후 자신에게 세계랭킹 1위를 내어줄 라파엘 나달(25·스페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생애 첫 윔블던 우승을 차지했다. 호주오픈 두 차례 우승을 합쳐 통산 세 번째이자 올 시즌 두 번째 그랜드 슬램 우승이다.

조코비치의 작년까지의 행보를 보면 페더러-나달 시대의 또다른 희생양이 아닌가 싶었다. 2008년 호주오픈 준결승에서 로저 페더러를 꺾고 결승에 올라 첫 그랜드 슬램 우승을 차지하였지만 작년까지 두 선수에게 밀려 3인자에 머물렀고 페더러와 나달 둘 중 하나가 부진에 빠질 때에만 가끔 2위에 이름을 올려 놓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조코비치가 아닌 페더러가 17번째 그랜드 슬램을 차지할 수 있을지 혹은 나달이 페더러의 기록을 넘어설 것인지에 더 관심을 가지며 올해 초까지도 3위에 머무르던 조코비치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테니스 선수의 전성기가 평균적으로 20대 중반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제 정점에 거의 다다른 것일지도 모를 조코비치도 앤디 로딕이나 레이튼 휴잇처럼 그저 한 번 그랜드 슬램을 차지했던 우수한 선수의 하나로 사라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올해 초부터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모두 폭발시키며 41연승의 돌풍을 일으켰다. 호주오픈에서 다시 페더러를 잡고 결승에 올라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출전하는 투어마다 페더러와 나달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프랑스오픈 4강에서 페더러에게 일격을 당하며 연승 행진이 중단되었지만, 이미 페더러를 2위 자리에서 끌어내린 후 멀찌감치 따돌렸고 1위 나달을 근소한 포인트 차이로 쫓았다. 그리고 윔블던 결승에 오르며 나달이 지켜오던 월드 넘버 원 등극이 예정된 상태에서 윔블던 타이틀을 놓고 현재가 아닌 전 1위가 되는 나달을 상대로 승리했다. 단 한 번의 패배가 아쉬울 정도로 시즌 48승 1패의 경이적인 승률을 자랑하며 극강의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 조코비치는 이제 페더러-나달의 시대의 막을 내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선수가 될지도 모른다.

드디어 윔블던 트로피에 입을 맞춘 조코비치 ⓒ AELTC / M. Hangst

 

대회 마지막 날 (7월 3일)

남자 결승 노박 조코비치 vs 라파엘 나달 (14:00 센터 코트)

경기 시작에 앞서 서로를 격려하는 두 선수 ⓒ AELTC / M. Hangst

나달은 그랜드 슬램 결승에서 로저 페더러 이외의 선수에게 져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두 선수의 상대전적은 나달이 16승 11패로 앞서 있었고, 윔블던 결승도 다섯 번째였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올해 나달을 만나 한 번도 지지 않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8강에서 발에 통증을 느꼈던 나달의 컨디션이 최고조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점도 조코비치에게는 유리한 부분이었다.(부상도 실력이다)

포어핸드 스트로크를 치기 전 공에서 시선을 집중하는 조코비치 ⓒ AELTC / T. Hindley


조코비치의 서브로 시작한 1세트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조코비치는 서브 에이스로 기분 좋은 출발을 했지만, 나달에게 연속으로 포어핸드를 맞으며 15-30으로 끌려갔다. 조코비치는 서브 에이스를 다시 터뜨리며 동점을 만들었고, 나달이 네트에 공을 꽂고 라인 밖으로 날린 덕분에 첫 게임을 승리로 장식했다. 톱랭커 간의 승부에서 자신의 서브 게임을 지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나달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서브 게임을 가볍게 챙기며 균형을 맞췄다. 이후 여섯 게임을 두 선수는 상대방에게 두 포인트 이상을 허용하지 않은 채 안전하게 자신의 서브 게임을 챙기며 4-4의 팽팽한 접전을 이어갔다. 조코비치가 아홉 번째 게임에서 이기며 5-4로 앞서 나갔고 나달의 서브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달은 연속으로 서브 에이스 두 개를 조코비치의 코트에 꽂으며 30-0의 리드를 잡았다. 5-5가 되고 첫 세트는 타이 브레이크로 이어질 분위기였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나달의 우측을 공략한 백핸드와 선상에 떨어지는 포어핸드로 동점을 만들었고, 나달은 포어핸드가 네트에 걸리며 세트 포인트를 허용하였다. 흔들린 나달은 포어핸드가 사이드라인을 벗어나면서 첫 세트를 내주고 말았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 나달 ⓒ AELTC / M. Hangst

2세트는 조코비치의 페이스로 진행되었다. 조코비치의 서브로 시작된 첫 게임에서 나달은 0-30으로 앞서며 분위기 전환을 꾀했다. 앤디 머리에게 첫 세트를 내준 후 연속으로 세 세트를 따내며 역전승을 거둔 준결승을 연상시키는 플레이였다. 그러나 나달은 왼쪽 사이드라인을 벗어나는 샷으로 동점을 허용하더니 스매시가 베이스라인을 벗어나면서 역전을 허용했다. 위기를 넘긴 조코비치는 서브 에이스를 날리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첫 게임을 가져갔고, 곧바로 나달의 서브 게임을 탈취하며 연속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15-15에서 조코비치는 나달의 서브를 노려 오른쪽 코너로 리턴하여 득점에 성공했고, 긴 랠리 끝에 나달이 백핸드를 네트에 꽂으며 브레이크 포인트가 되었다. 조코비치는 치열한 랠리가 발리로 이어지는 순간 나달의 키를 넘겨 빈 코트로 떨어지는 백핸드 샷을 날리며 승리했다. 다음 게임에서도 조코비치는 서브 에이스 두 개를 포함하여 쉽게 이기며 3-0으로 달아나 나달의 추격권에서 벗어났다. 나달은 뒤늦게 한 게임을 따내며 추격에 나섰지만, 조코비치는 4-1에서 다시 나달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여 추격의 여지를 없애며 6-1로 세트를 마무리했다.

함성을 지르며 스스로를 격려하는 조코비치 ⓒ AELTC / M. Hangst


조코비치는 4라운드부터 준결승까지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며 어렵지 않게 승리를 챙겼지만 꼭 마치 다른 사람처럼 리듬을 잃고 한 세트 씩 내주었는데 결승에서도 3세트에서 갑자기 샷의 난조를 보이며 나달에게 추격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나달은 자신의 서브로 시작한 첫 게임을 이기며 반격을 위한 시동을 걸었고, 바로 조코비치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기세를 올렸다. 두 번째 게임은 나달의 포어핸드 위너에 이은 조코비치의 어림없이 빗나가는 뜬 공으로 0-30이 되었고, 나달의 리턴 실패와 조코비치의 서브 에이스로 30-30이 되는 접전이었다. 그러나 조코비치의 포어핸드가 빗나가며 나달은 첫 브레이크 포인트에 도달했고, 조코비치가 백핸드를 네트에 날리며 나달은 첫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상승세를 탄 나달은 러브 게임으로 세 번째 게임까지 승리하여 3-0으로 앞서며 조코비치가 주도해오던 경기 흐름을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조코비치는 나달의 키를 넘기는 로빙 샷으로 한 게임을 따냈지만, 나달이 나머지 세 게임을 쓸어 담으며 3세트를 6-1로 이겼다.

조코비치 날다 ⓒ AELTC / M. Hangst


운명의 4세트는 조코비치의 서브 게임으로 시작하였다. 나달은 첫 게임에서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돌릴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잡았다. 30-30에서 조코비치가 나달의 포어핸드를 넘기지 못하고 네트에 꽂으며 나달은 브레이크 포인트가 되었다. 그러나 나달은 조코비치의 공격을 받아 친 포어핸드가 벗어나며 듀스를 허용하였고 연속으로 조코비치에게 두 포인트를 내주며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위기에서 벗어난 조코비치는 나달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2-0으로 앞서갔다. 나달은 실책을 연발하며 조코비치에게 쉬운 브레이크를 허용하며 승부가 기우는 듯했지만 아직 조코비치가 승리를 속단하기는 일렀다. 30-40으로 조코비치가 브레이크 포인트에 몰린 상황에서 넣은 서브를 나달이 포어핸드 슬라이스로 받아쳤고, 이 공은 네트 윗 부분을 맞고 조코비치의 코트로 떨어졌다. 나달은 의례적인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운이 따르는 브레이크였고, 여기에 약간 흔들린 조코비치가 이어진 게임에서 실책을 연발하며 2-2 동점이 되었다.

이겼다! ⓒ AELTC / T. Hindley


나달이 경기를 뒤집기 위해서는 조코비치가 잘 나가던 분위기가 깨진 이 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다시 냉정을 되찾아 나달을 무섭게 몰아붙였고 30-30에서 나달의 백핸드가 네트에 걸리고 포어핸드 리턴이 베이스라인을 넘어가면서 3-2로 앞서기 시작했다. 조코비치가 강해진 가장 큰 이유는 경기 중에 페이스가 잠시 흔들리더라도 금방 다시 마음을 다잡고 경기에 임하는 정신적인 안정인지도 모른다. 나달과 조코비치는 서로 서브 게임을 지키며 4-3이 되었고, 조코비치가 승부에 결정타를 날리는 브레이크를 하는 여덟 번째 게임에 돌입하였다. 나달은 이 경기에서 유일한 더블 폴트를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저지르며 출발이 좋지 않았는데 나달의 톱스핀 포어핸드가 벗어나고 네트에 걸리며 순식간에 쓰리 브레이크 포인트에 몰렸다. 나달은 포어핸드로 한 포인트를 만회하지만, 백핸드가 다시 길게 벗어나면서 결정적인 브레이크를 당했다. 이제 두 선수는 5-3 조코비치의 리드 속에 결승전 마지막이 된 게임에 돌입했다. 30-30으로 맞서며 아직 나달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재치있는 발리로 챔피언쉽 포인트에 도달했고, 나달의 백핸드를 겨냥한 조코비치의 깊은 크로스 백핸드 스트로크를 나달이 라인 밖으로 쳐내면서 조코비치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하늘이시여! ⓒ AELTC / M. Hangst

 

경기 요약 (출처: 윔블던 공식 사이트)

나달은 첫 서브 성공률이 좋았지만 그것이 득점과 연결되는 확률이 조코비치에 비해 낮았다. 팽팽한 접전에서 랠리를 리드한 것은 조코비치였고 그런 점들이 그대로 기록에 나타나 있다.

챔피언 그리고 준우승이 어색한 나달 ⓒ AELTC / M. Hangst


이미 1위를 예약한 조코비치였지만 윔블던 우승으로 2위 라파엘 나달과의 격차를 더 벌릴 수 있게 되었다. 조코비치는 7월 4일자 ATP 랭킹에서 13,285점으로 11,270점의 나달과 2,000점 이상으로 차이를 벌렸고, 나달은 그대로 9,230점을 유지한 3위 페더러와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조코비치는 올 시즌 나달과의 상대에서 연승 행진을 이어가면서 마지막 그랜드 슬램인 US 오픈에서 나달에게 작년의 결승전 패배를 설욕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잔디 먹는 조코비치 ⓒ AELTC / S. Wake


조코비치는 "생애 최고의 날" 이라면서 우승의 기쁨을 표현했고, 센터 코트의 잔디를 뜯어 맛을 보는 독특한 세리머니를 하여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첫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후 타이틀 방어와 사람들의 기대, 성적에 대한 부담 속에 많은 압박을 받았고, 최소한 4강 이상을 진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나달과 페더러가 지배하는 가운데 자신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스스로도 의심하고 고민했음을 솔직히 말했다. 나달은 핑계를 대지 않고 조코비치가 대단하고 환상적인 경기를 했는데 자신이 그 이상 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 패배를 인정했다. 또 현재 최고이자 내일이면 세계 최고의 선수와 경기를 했고, 자신은 두 번째라며 조코비치를 칭찬함과 동시에 세계 1위를 내준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 윔블던에서 우승하던 때를 기억하기 때문에 조코비치가 지금 얼마나 기쁠지 잘 알고 있다며 그의 우승을 축하하였다. 한편 이 날 경기가 열린 센터 코트에는 세르비아의 대통령 보리스 타딕이 로얄석에서 앉아 직접 조코비치를 응원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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