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연아가 2013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대회 여자 싱글에서 우승했다. 냉정히 말하자면 대회가 비중이 큰 대회가 아니어서 김연아가 출전하지 않았더라면 별로 관심조차 갖지 않았겠지만, '여왕의 귀환' 덕분에 생중계도 되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도 했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ISU 그랑프리 파이널과 시기가 겹친 덕분에 이 대회에 출전한 아사다 마오의 성적과 비교를 하기도 했는데, 참가 선수들의 수준도 차이가 있었지만 심사위원들의 면면도 다른 대회였기에 점수를 놓고 비교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이제 약 두 달 후에 소치 올림픽이 열리는데 여자 피겨 싱글 부문에서는 김연아와 아사다의 대결로 압축되는 분위기지만, 이 두 선수의 틈바구니에서 적지 않은 존재감을 과시해왔던 안도 미키에 대한 글을 하나 써볼까 한다. 피겨에 많은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도 미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지만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 면서 다시 스케이트화를 신고 빙판 위에서 연기를 펼치는 그녀의 말에 애잔함을 느끼며, 안도 미키의 굴곡진 피겨 인생을 잠시 살펴볼까 한다. 분량이 적지 않을 듯한 관계로 두 번에 나누어 글을 쓰려고 하는데 1편은 '피겨 신동에서 추락한 아이돌이 되기까지' 로 미키의 피겨 시작부터 토리노 올림픽 이후까지, 2편은 '반복되는 고난과 마지막 도전' 으로 주인공에서 멀어졌지만 꿋꿋이 버틴 선수 생활과 유종의 미를 꿈꾸는 현재의 모습을 담아볼까 한다.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하고 순서대로 배열하다보니 아무래도 시간이 걸려서 미키에게는 운명의 시간이 될 전일본선수권(12월 22-23일)이 끝나기 전까지 글을 쓸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가급적 빨리 마무리를 짓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진 때문에 참 욕을 많이 먹었다지. (사진 : 안도 미키 트위터)

 

 

 

 

 



安藤美姫

안도 미키


생년월일 : 1987년 12월 18일(25세. 곧 26세가 된다)

출생지 : 아이치현 나고야시

신장 : 162cm

체중 : 47kg

출신교 : 쥬쿄대학부속 쥬코고등학교 - 쥬쿄대학 졸업

가족관계 : 어머니, 딸

애칭 : 미키티




김연아가 본격적으로 시니어 무대에 출전한 이래, 안도 미키는 일본에서 2인자로 여겨지는 선수. 2인자의 설움은 어디에든 있는 법이지만 안도 미키는 단지 2인자라서가 아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에서 저평가를 넘어서 지나칠 정도의 많은 안티 세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미키(美姫)라는 이름에서 姫라는 글자가 일본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일한국인이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 (미키라는 이름이 일본에서 흔한 이름이지만 한자로 쓰는 이름자는 美貴, 美喜, 美希, 美紀, 美樹 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외모를 보면 아무리 보아도 일본인이다.

 

 

 

 

이런 멀쩡한 사진이 있음에도 구글링을 조금만 해보면 온갖 굴욕 사진을 찾을 수 있고, 악의적으로 합성한 사진도 적지 않다. (사진 : 마이니치)

 

 

 

 

어릴 적 사진 같은데 안티팬들이 자주 사용하는 사진 중의 하나.

국내 언론에서도 이와 관련된 사진을 기사로 낸 적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괴상망측하게 합성한 사진도 떠돌아다닌다.

이런 짓을 하면 즐거울까?

 

 

 

<피겨 신동의 유년기와 주니어시절>

 

친구를 따라 8세 때 스케이트에 입문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를 잃고 만다. 당시 배우던 코치의 추천으로 몬나 유코(門奈裕子)코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다음 해에 더블 악셀을, 그다음 해에는 트리플 살코와 트리플 토루프를 익힌다. 11세가 된 1998년, '아이치현 지사상 쟁탈 대회'라는 작은 대회에서 우승하며 자신감을 얻고 전국 무대에로 진출한다. 이어지는 1998-1999시즌에 전일본노비스선수권 B클래스에서 3위를 차지하고, 1999-2000시즌에는 다이에 OAC 컵 대회에서 우승, 노비스 선수권 A 클래스 우승하고, 12세가 되기를 며칠 앞두고 열린 전일본피겨스케이트주니어선수권에서 7위를 차지하며 피겨 신동으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2000년부터는 요코하마의 사토 노부오(佐藤信夫) 코치에게 지도를 받으며, 3회전 러츠-3회전 루프를 익히고 노비스 선수권 2연패에 성공하고, 전일본피겨스케이트주니어선수권에서 3위에 입상한다. 당시 미키(일본인의 이름을 줄여서 부를 때 성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서는 친숙하게 이름을 부르기로 함)의 나이는 만 13세가 되기 20일 정도 남겨둔 때였다. 그 밖에도 여러 대회에서 우승 혹은 상위권 입상의 호성적을 남기며 13세가 된 2001년 4월, 미키는 일본 스케이트 연맹 주니어 강화 선수로 선발된다. 이미 악셀을 제외한 3회전 점프 5종(러츠, 플립, 토루프, 루프, 살코)를 모두 익힌 재능을 눈여겨보고 기대주로 점찍은 것. 

 

2001-2002시즌부터 미키는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는데, 2001년 9월 체코 오스트라바에서 열린 ISU 주니어그랑프리에서 쇼트 3위, 프리 1위, 종합 1위로 우승컵을 차지한데 이어 11월에는 스웨덴 말뫼에서 열린 ISU 주니어그랑프리에서는 쇼트, 프리, 종합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일본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통하는 기대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3주 후에 열린 전일본주니어선수권에서 쇼트, 프리, 종합 1위를 석권, 12월에는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쇼트 2위, 프리 1위, 종합 1위로 우승하며 출전한 그랑프리대회를 모두 우승으로 마감하는 괴력을 선보인다. 제70회 전일본피겨스케이트선수권대회에서는 3위를 차지하는데 1위는 미키보다 7살 연상의 와세다대학 소속 대학생이었던 수구리 후미에(村主章枝), 2위 역시 같은 와세다대학의 선수이자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6살 연상의 아라카와 시즈카(荒川静香)였다. 참고로 4위는 종종 국제 경기에서도 볼 수 있는 당시 16세의 스즈키 아키코(鈴木明子), 5위는 스즈키와 동갑내기 나카노 유카리(中野友加里)였다. 이 대회는 일본 전역에 TV로 중계되면서 미키가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다. 2012년 2월, 전국 중학생 피겨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3월에는 노르웨이 하마르에서 열린 ISU 주니어 피겨스케이팅챔피언십(세계 주니어선수권)에 출전하여 3위에 입상한다. 많은 기대가 부담이 되었던 것인지, 경기 전날 열이 오르는 등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다고 한다. 이 대회의 우승자는 한국계 입양아라는 미국의 앤 패트리스 맥도너, 2위는 나카노 유카리. 

 


2002 세계 주니어선수권 쇼트프로그램


2002 세계 주니어선수권 프리스케이팅
꽈당~!

 

2002-2003시즌에는 미키의 전매특허이자 결국 선수생활 커리어에 있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된 4회전 점프를 선보이게 된다. 우선 2002년 4월, 미키는 주니어만이 아닌 시니어 부문에서의 강화 선수로도 선발된다. 당시 14세 4개월의 나이라서 시니어 자격이 주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연맹이 좋게 말하면 초유망주의 집중 관리에 나선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설레발을 친 것이다. 과거에도 주니어와 시니어 강화 선수로 중복 선정된 경우가 있다고 하나 최연소 케이스이며, 아직까지 이 기록을 깨는 선수는 없다고 한다. 미키는 이미 오래 전에 트리플 5종을 습득하고 트리플 악셀까지 익힌 상태여서 이 점프를 더 연마하여 성공률을 높이고 연기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강력한 점프를 익히게 된다. 이른바 4회전 점프, 쿼드러플 살코와 쿼드러플 루프를 익혔단다. 2002년 9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ISU주니어그랑프리에서 쇼트 3위, 프리 1위, 종합 1위로 우승을 차지한다. 시즌을 준비하면서 프리스케이팅에서 4회전 점프가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었지만, 쇼트에서 3위에 머물러 부담감이 큰 탓에 프리에서 4회전 점프를 3회전으로 바꾸어 출전했고 클린 연기를 펼치며 역전 우승에 성공한다.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ISU주니어그랑프리에서는 쇼트 2위, 프리 1위, 종합 1위로 역시 우승. 이 대회에서는 과감하게 프리에서 쿼드러플 살코를 시도했지만 착지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더블 악셀과 트리플 러츠-트리플 루프에 이어 트리플 플립을 성공시키며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11월에는 서일본 주니어 선수권과 전일본 주니어 선수권에서 전 부문 1위로 연속 우승을 차지한다. 12월에는 일본스케이트연맹의 요청에 따라 ISU 그랑프리 NHK 트로피에서 본대회가 아닌 홍보를 위해 전시성으로 나와서 쿼드러플 살코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NHK트로피 (번외)에서 쿼드 살코를 성공시킨 미키.

당시 프로그램 구성은 2A , 4S , CoSp , 3Lz +3 Lo , 3Lo , SpSq , CCoSp (소요 시간 : 3 분 15 초)

 

그러나 이런 행사에 참여한 부작용이었을까 곧이어 참가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오타 유키나(太田由希奈)와 캐롤라인 코스트너(이탈리아)에게 밀려 3위에 그치고 만다. 이 대회의 유일한 수확이라면 여자 최초의 4회전 점프를 공인받은 것인데, 프리스케이팅에서 쿼드러플 살코를 성공시켜 여자 싱글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는)최후의 4회전 점프를 인정받았다. 다음 주에 열린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전년보다 두 계단 하락한 5위에 그치고, 2003년에 체코 오스트라바에서 열린 ISU주니어챔피언쉽에서도 오타 유키나에게 밀려 전년보다 한 단계 상승한 2위를 차지하는데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전무후무한 4회전 점프를 보여주면서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모닝구무스메의 후지모토 미키(藤本美貴)의 애칭이었던 "미키티(ミキティ)”가 안도 미키에게도 따라붙게 된다. (얘들 말고도 미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미키티라고 부르기도 하더라만..)


2003-2004시즌은 주니어 대회를 평정하고 시니어 대회에도 발을 내딛기 시작한 시기였다. 9월 멕시코시티, 10월 일본 오카야시에서 열린 ISU주니어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11월에 전일본주니어선수권에서 쿼드러플 살코를 앞세워 3연패를 달성한다. 12월에는 스웨덴 말뫼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우승하며 2년 만에 정상의 자리에 오른데 이어, 전일본선수권마저 우승을 차지하며 시니어 대회에서 첫 우승(쇼트 2위, 프리 1위, 종합 1위)을 차지한다. 이 대회에서 프리스케이팅에서 쿼드러플 살코, 트리플 러츠-트리플 루프, 트리플 토루프-트리플 토 루프의 1쿼드 6트리플 구성을 완벽하게 성공시키며 절정에 오른 기량을 자랑한다. 2004년 3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ISU 주니어챔피언십에서 드디어 우승을 차지하고, 전일본선수권 우승자의 자격으로 참여한 ISU세계피겨챔피언십(세계선수권)에서 4위에 오른다. 이 대회의 우승자는 아라카와 시즈카, 2위는 샤샤 코헨(미국), 3위는 미셸 콴(미국). 

 

 

 

주니어 그랑프리파이널 (2003.12)

 

 

 

전일본선수권대회 (2003.12)

 

 

세계선수권 (2004.3) 쇼트프로그램

 

 

세계선수권 (2004.3) 프리스케이팅

 

 

 

마샬스 세계 스케이팅 챌린지(2004.4) 프리스케이팅


세계선수권 이후 미국의 마샬스 세계 스케이팅 챌린지에도 출전하는데, 이 대회에서도 코헨, 아라카와, 콴에 이어서 4위를 차지한다. 경험이 일천한 미키가 두 대회 연속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콴과 일본의 백전노장 아라카와, 그리고 미국의 최고 선수였던 코헨에 이은 4위라는 성적은 자신감을 가질 만큼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시니어무대 활약>


16세가 된 2004-2005시즌부터는 주니어 대회는 제쳐두고 시니어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이미 경쟁자가 없는 주니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이나 다름없는데다 2006년에 토리노 올림픽이 열리기에 시니어 대회의 적응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 시즌에서 우승은 국내 대회인 전일본선수권이 유일했다. 

 

그랑프리시리즈에 앞서 현지 적응 겸 경험을 위해 출전한 캠벨스 인터내셔널 클래식에서 콴, 아라카와, 코헨에 이어 4위를 차지한다. 그랑프리시리즈에서는 첫 대회였던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3위에 오른 것자국에서 열린 NHK 트로피에서 아라카와 시즈카에 이어 2위에 오른 것을 제외하면 메달권 입상에 실패하고 말았다. (세 번째로 참여한 그랑프리시리즈의 중국 대회에서는 4위에 그친다)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4위에 그쳤고, 전년도에 4위에 올랐던 세계선수권에서도 6위로 뒷걸음을 치고 만다. 그러나 시니어 무대에서의 첫 시즌이었음을 감안하면 선전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NHK 트로피의 프리스케이팅에서 자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 컸다. 쇼트에서 1위였던 아라카와에 13.3점이나 뒤진 3위에 그쳤던 미키는 프리에서 119.46점을 기록하며 최고점을 기록하며 2위로 뛰어오르게 된다. 3회전 러츠-3회전 루프-2회전 토루프라는 최고 난이도의 3단 콤보를 성공시키며 GOE 15.2점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여자 피겨에서 한 번의 점프에서 기록한 점수 중에서 최고점이라고 한다. 

 

 


캠벨스 인터내셔널 클래식 프리스케이팅 (2004.10)


스케이트 아메리카 쇼트프로그램 (2004.10)
쇼트에서는 좋은 연기로 1위를 차지하지만 프리에서 망치면서 종합 3위에 그친다.


NHK트로피 프리스케이팅 (2004.11)



세계선수권 쇼트프로그램. 7위를 기록한다 (2005.3)



세계선수권 프리스케이팅. 역시 7위를 기록하는데 종합에서 6위가 되었다 (2005.3)


유일하게 우승을 차지한 전일본선수권에서 미키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선수는 당시 만 15세의 아사다 마오(浅田真央)였다. 아사다 역시 이미 일본 피겨계가 주목하던 초우량 유망주였는데 미키가 자리를 비운 주니어 대회에 출전하면서 그랑프리시리즈를 2회 우승하는 등 착실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3년 전 전일본대회 우승자였던 수구리는 젊은 피에게 밀려 간신히 3위에 그치고 말았다는.



2004년 미키는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아이스쇼에 종종 참가를 한다. 



대부분의 쇼에서 같은 의상을 입고 출전하는데 



2005년 1월 2일 스타즈 온 아이스쇼



이것도 같은 곳에서.


올림픽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미키가 어느 정도의 관심을 받고 있었는지는 당시 스포츠지의 기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미키가 세계선수권에서 예선 3위로 본선에 오른 소식이 스포츠신문의 톱기사로 가득 채워졌다.
이 대회 전부터 일본 언론들은 4회전 점프를 앞세운 미키가 향상된 표현력으로 우승에 도전한다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럼에도 여전히 미키는 여전히 최고의 스타였는데, 아사다 마오의 언니로 더 유명한 아사다 마이(浅田舞)가 연예계 진출을 한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마이를 수식하는 어구가 "안도 미키의 라이벌" 이었다고. 귀국 인터뷰에서 미키는 거리를 보통 때처럼 걷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음을 뜻한다. 귀국 이후 계속적으로 미키의 사생활 등의 가십거리를 주제로 한 기사가 계속 나오고 언론의 취재가 과열되자 일본스케이트연맹은 잡지 협회에 공식적으로 미키에 대한 과열 취재 자제 요청을 할 정도에까지 이른다.




4월 1일에는 일본 최고의 인기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도쿄돔 홈경기에서 시구를 맡았다.
특급 아이돌 수준의 인기였다고 하면 될 것 같다.





시구에 이어서 피겨스케이팅에서 관중에게 하는 답례의 인사도 하는 미키


<기대와 실망의 토리노 올림픽>

일본 전역의 많은 관심과 기대 속에서 미키는 토리노 올림픽을 위한 준비에 나선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그동안 함께 해왔던 사토 노부오 코치 대신 새로운 코치를 찾았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캐롤 젠킨스 코치를 새 코치로 맞이하게 된다. 이 당시 미키에게는 고민이 있었는데 2003년 전일본선수권 이후 실전에서 4회전 점프를 하지 못한 것이었다. 신체의 성장에 따라 몸이 무거워지면서 예전처럼 점프를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에 일본스케이트연맹은 올림픽 메달 획득을 목표로 미키의 코치를 새로 선임하기로 한다. 마이니치신문은 "안도 미키 17세, 토리노 올림픽에" 라는 주제로 20회 연속 기사를 내기로 할 정도로 미키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여전하였다.








미키의 새 안무가는 김연아의 안무가로도 유명한 데이비드 윌슨. 그와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간다. 



6월 20일에는 미키를 비롯한 토리노 올림픽을 목표로 한 특별 강화선수 5명을 담은 사진집이 출간되면서 열기는 더욱 달아오른다.

고등학교 3학년인 미키의 쥬쿄대 진학 희망과 함께, 미키와 마오를 위한 40인 체제 프로젝트를 가동한다고 일본에서는 난리가 난다. 우연하게도 미키와 마오는 나고야 동향 출신으로 나고야 소재의 쥬쿄대는 부속 중고등학교부터 우수한 피겨선수를 보유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미키는 미국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국내의 바쁜 일정을 소화한다.



미키는 아라카와, 수구리 등과 함께 아이스쇼에 참가하였는데 만원 사례를 이루었다고.



토리노 올림픽 선수단 공식단복 모델로 등장

8월 2일, 토리노 올림픽에서 선수단이 입을 공식 단복 발표회에서 미키는 모델로 선발되어 이 행사에 참여한다. 아직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누구도 미키가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미키는 인터뷰에서 "너무 예쁘다. 실전에서 입으면 기쁠 것 같다" 는 소감을 밝혔다. 올림픽이 약 6개월 정도 남은 시점에서 롯데 가나초콜릿의 모델로 미키와 아라카와, 수구리가 출연하는 광고가 공식 발표되었다. 이미 6월부터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해졌는데, 아직 이 세 명이 올림픽 출전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그만큼 이들의 인기가 좋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키는 훈련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떠나 토리노 올림픽을 위한 준비를 한다.



10월에 열린 저팬 인터내셔널 챌린지대회 모습



2005년 10월, 저팬 인터내셔널 챌린지에서 미키는 3위에 입상한다. 쇼트 없이 프리스케이팅으로만 구성된 대회였는데 1위는 러시아의 이리나 슬루츠카야, 2위는 아라카와였다. 소녀의 티를 벗고 제법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기장 밖 노상에서 훈련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11월에는 미키가 도요타자동차에 입사 내정이라는 기사가 발표되는데, 스폰서가 아닌 사원으로 피겨 경기를 하는 것이라고. 이에 미키는 "희망하던 지역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결정되어 좋다. 사회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열심히 하겠다" 는  소감을 밝힌다. 주쿄대 40인 프로젝트 어쩌고는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모양. 도요타 관계자에 따르면 미키는 쥬쿄대에 사회인 신분으로 입학 것 역시 희망하고 있어서 학업과 일, 그리고 스케이트를 병행하고자 한다고. 하나라도 잘하기 힘들지 않나 싶지만.



그리고 11월 18일, 공식 웹사이트를 오픈했는데 이 날 접속이 폭주하여 사이트가 먹통이 되었다고 한다. 트윙클 밴드를 판매하여 수익금을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자선 활동도 하였다고. 그러나 지금은 이 사이트는 사라져버렸다.



토리노 올림픽을 맞이하여 미키 등 일본 대표선수들을 모델로 한 조지아 커피 특별판이 나오기도 했다.

드디어 미키는 토리노 올림픽의 전초전이 될 그랑프리시리즈에 출전하게 된다. 미키는 1~4차 대회에 불참하고, 5차 대회인 컵 오브 러시아와 6차 대회인 NHK 트로피에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러시아컵에서 미키는 쇼트, 프리, 종합에서 모두 슬루츠카야에게 뒤진 2위를 기록하는데 점수차는 적지 않았다. 3위 역시 일본 선수인 온다 요시에(恩田美栄)가 차지했는데, 슬루츠카야와 미키의 차이 이상으로 2위와 3위의 점수 차가 커서 별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이 대회에서 미키는 필살기인 쿼드 살코를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미키가 쿼드 살코를 성공하면..' 하는 기대를 계속 품게 된다.


2005년 컵 오브 러시아 쇼트프로그램




그랑프리 5차 컵 오브 러시아 대회에서의 안도 미키 (2005.11)

마침내 미키는 마지막 그랑프리 시리즈 출전을 위해 일본으로 귀국한다. 여전히 일본의 언론과 팬들의 관심은 미키가 4회전 점프를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에 넣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는데, 이에 관해 미키는 이전의 인터뷰에서 연습 중에 단독으로 4회전 점프를 했을 때 성공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대회 프로그램에 넣을지는 망설이고 있었다. 점프의 성공시 얻을 이점은 확실하지만, 반대로 1~2점 차이에서 순위가 갈릴 수 있는 올림픽에서 반드시 모험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단순히 점프 한 번 시도하는 것과 3분 30초의 시간 동안 연기를 이어서 해야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오사카에서 열리는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간사이공항으로 입국한 미키를 에스코트하는 모습.




NHK 트로피를 앞두고 연습 중인 미키

NHK 트로피에서 미키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좋은 활약이 기대되었지만, 의외로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몸놀림이 가벼워보이지는 않았는데, 점프는 그럭저럭 무난하게 마쳤지만 스핀에서 무너져버리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 쇼트를 4위로 마친 후 미키 스스로 "오늘의 평가는 마이너스다. 피로로 몸이 딱딱하고, 생각처럼 탈 수 없었다. 연전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최초의 순서에서 점수가 나오기 힘든 것도 신경이 쓰여 부정적으로 생각한 면이 많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2005년 NHK 트로피 쇼트프로그램

미키는 대체로 쇼트에서는 부진하지만 프리에서 점수를 만회하여 성적을 끌어올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프리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4위에 그치고 만 것. 결국 종합 4위로 포인트 5점 획득에 그치고 마는데, 미키가 출전하지 않았던 다른 그랑프리시리즈에서 두 번의 우승을 차지한 아사다와는 크게 비교가 되는 성적이었다. 2주 후에 장소만 도쿄로 바꾸어 열리는 그랑프리 파이널에서의 활약이 기대되었지만 아사다가 러시아의 슬루츠카야를 누르고 쇼트, 프리, 종합 모두에서 1위로 우승을 차지한데 반해, 미키는 쇼트 3위, 프리 4위의 부진과 함께 종합 4위에 머무르고 만다.

다음 주에는 토리노 올림픽 대표 선발을 겸한 전일본 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수구리, 아사다, 아라카와가 1,2,3위를 차지한 가운데 온다와 나카노에게까지 밀리며 6위에 그치고 말았다. 쇼트나 프리 둘 중 하나에서 임팩트를 주다가 실수로 하나를 망친 것도 아니고 둘 다 6위를 차지한 평범한 성적이었다. 이 중에서 아사다는 만 15세로 애초부터 대회가 개최되는 해의 7월 1일까지 만 16세가 되어야 한다는 규정에 걸려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했기에 논외로 치더라도, 올림픽을 두 달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미키가 대표로 선발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행히도 규정이 올림픽 직전 두 시즌의 성적을 토대로 선발하는 것이었기에 미키는 쌓아둔 실적 덕분에 토리노행 티켓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미키는 대표 선발 직후 "전일본대회에서는 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대표가 되어 기쁘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 토리노까지 더 한층 커지고 노력하겠다" 고 선발 소감을 말했다.

드디어 해가 바뀌고 올림픽이 열리는 2006년, 미키와 수구리, 아라카와는 남자대표 다카하시 다이스케와 함께 토리노에서 경기를 하게 될 경기장을 직접 방문하여 5일간 합숙을 하고 돌아온다. 1월 10일 자신이 재학 중인 나고야의 쥬쿄대 부속 쥬쿄고등학교의 개학에 맞춰 학교를 방문한 미키는 자신이 발가락 골절상을 입은 사실을 밝힌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 놀라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런 몸으로 올림픽에 나가서 활약할 수 있겠냐고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미키는 앞으로 2주 후면 완치가 될 것이고, 미국으로 가서 점프 훈련을 늘려서 대회에 대비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1월 12일 아이치현 지사를 만나서 올림픽에서 4회전 점프를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데.. 





미키는 올림픽 쇼트프로그램을 32일 남긴 1월 21일 미국으로 출발한다. 머리를 산뜻하게 자르고 등장한 미키는 인터뷰에서 "프로그램을 바꿔서 시간이 부족하다. 라스트 스퍼트를 하겠다" 는 말을 하는데, 올림픽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의 프로그램 변경은 예고된 재앙이었음을 이 때는 알지 못했다.




훈련을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미키


여론조사에서 미키에게 메달을 기대한다는 반응이 36%가 나왔다는 기사가 보도되는가 하면, 일본 야후 웹사이트의 올림픽 특집 세션의 메인에 미키가 등장한다. 그 뿐이랴, 롯데가나가 조사한 결과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받고 싶은 올림픽 선수를 묻는 조사에서 미키가 37.5%를 차지해 1위에 올랐다고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야후 저팬의 토리노 올림픽 섹션 배너.
최고 인기 선수가 모델인 것은 당연하기는 한데.. 쩝.

쇼트프로그램 1주일 전인 2월 14일, 미국에서 훈련을 하던 미키는 토리노에 도착한다. 외국에도 미키의 팬이 있었다고 일본 언론은 호들갑을 떨고, 이틀 후의 기자회견에서 실패하더라도 4회전 점프를 넣고 싶고,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미키와 관련된 기사는 인터넷 상에서 조회수 상위 랭킹에 오르고, 그녀에 대한 기대는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런데 일본 언론에서 사고를 뻥 터뜨리는데, 대회 직전 선수 인터뷰 말미에 어떤 기자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어떤 맹세를 가지고 뛰고 싶은가?" 는 질문을 한다. 약간은 들뜬 분위기였던 미키는 이 질문을 받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간신히 "개인적인 질문이므로 대답할 수 없다"고 대답하기는 하였지만 계속 울어버렸고 다른 선수들의 분위기까지 안 좋아지고 말았단다. 이 질문을 한 기자는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는데 NHK소속 기자 혹은 찌라시를 내는 주간지 기자일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으나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울음을 터뜨리는 미키



미키를 달래는 젠킨스 할머니

드디어 쇼트프로그램이 열리는 날, 미키는 일본 선수 중 가장 먼저인 14번째로 출전할 예정이었다. 트리플 러츠-트리플 루프에서 마지막 점프의 착지가 불안정하여 손을 짚은 것을 빼고는 크게 눈에 띄는 실수는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덤벼든다',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는 느낌을 주는 연기로 지켜보는 사람이 불안한 경기를 했다. 쇼트 성적은 56.0점으로 8위였는데, 1위 코헨, 2위 슬루츠카야, 3위 아라카와와는 10점 이상 차이가 나서 메달권에 진입은 어려워보였다. 당시 1위와 3위의 점수차가 0.71점에 불과하여 이 세 선수가 메달의 색깔을 놓고 프리스케이팅에서 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수구리는 1위와 약 5점 정도 차이로 4위였는데, 프리 결과에 따라 메달권 진입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키의 토리노 올림픽 쇼트프로그램

미키는 프리스케이팅에서 오랫동안 봉인해왔던 쿼드 살코를 시도하기로 한 프로그램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도 처참했다. 쿼드 살코를 포함한 점프에서 네 번의 실수를 저지르며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만다. 


전설의 미키의 프리스케이팅.
이것은 퍼니스트 비디오가 아니다.



채점을 기다리는데 이미 정신줄은 나가 있다.

결국 미키는 프리 16위로 종합 15위로 내려앉고 마는 대참사를 겪고 만다. 반면 쇼트 3위였던 아라카와는 '인생경기'를 펼치며 역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모든 관심은 그녀에게로 쏠리게 되었다. 더군다나 아라카와의 금메달은 올림픽에서 일본 대표팀이 전 종목에 걸쳐 유일하게 따낸 메달이었다. 아라카와는 올림픽의 주역이었고, 아라카와가 곧 올림픽을 뜻하는 것이었다.



목마를 탄 채 폐막식에 참가하는 아라카와, 밑에 미키가 보인다.

올림픽에서 미키가 자신의 팬을 비롯한 많은 일본인들에게 실망을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본이 자부하는 아라카와가 여자 피겨에서 금메달을 땄기에 미키에 대한 비난 혹은 비판이 어느 정도 줄어들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아라카와 역시 올림픽 직후의 짧은 기간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뿐, 곧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간 소위 "스타성이 크지 않은 선수"였다. 이에 대해서 아라카와의 선수 생활 커리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라카와 역시 미키처럼 초등학생 때 3회전 5종 점프를 익히고, 전일본선수권을 제패하면서 주목을 받은 "천재 소녀" 였다. 1998년 어린 나이인 16세에 자국에서 열린 나가노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 많은 자국민들의 기대 속에서 출전한 아라카와의 첫 올림픽은 8년 후의 미키처럼 기대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쇼트에서는 플립 점프의 다운그레이드 등으로 14위, 프리에서는 미키처럼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지막의 점프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14위, 종합 13위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에는 기술 점수와 예술 점수의 비중이 5:5으로 고난이도 기술만이 아닌 예술적인 표현력이 중요했던 시기이기도 했거니와, 유럽과 미국이 피겨를 양분하고 있던 시기었기에 다소 짜게 평가를 받은 점도 없지는 않았다.) 올림픽에서 실패를 겪은 후, 아라카와는 부진을 겪기도 하고 정신을 차릴 무렵에는 온다와 수구리에 밀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출전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 대회에 출전했던 수구리는 5위에 오르며, 이토 미도리의 은메달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아라카와는 이후 4년 동안 절치부심해서 출전하는 그랑프리시리즈 및 세계선수권 등에서 줄곧 메달권에 입상하는 호성적을 거두며 올림픽 진출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2004년부터 시행된 신채점제는 기술점수의 비중이 커지면서 연기와 표현 등의 예술성이 떨어지더라도 난이도 높은 기술을 정확히 구사하는 선수들에게 유리해지게 되었는데(덕분에 고난이도 기술보다는 예전 방식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피겨를 지향하던 미국의 피겨는 서서히 몰락하여 최근에는 국제무대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점프에 목을 매는 일본 피겨 선수들이 기술점수 면에서 혜택을 받게 된 셈이었다. 아라카와는 프리에서 트리플 러츠-트리플 루프 연속점프의 뒤의 루프가 더블로 다운그레이드된 것 이외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며, 위의 표현대로 '인생경기' 를 치르면서 자신의 역대 최고 점수 및 성적을 내게 된다. 당시 그녀의 나이 24세로 피겨선수로는 환갑을 지난 나이였고(이것은 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최고령 금메달 기록을 세운다), 올림픽 직후 프로 전향을 하면서 경쟁 무대에서 은퇴하게 된다. 따라서 올림픽 직후 "올림픽 유일 메달 획득 선수", "피겨여왕" 등의 칭호로 개선 행사 및 몇 차례의 TV프로그램 게스트 출연 등을 제외하고 더이상 매스컴이 그녀를 붙잡을 이유가 없어졌다. 아이돌로 떠받들 선수도 아니었으며, 기껏해야 나가노 올림픽 이후 8년 동안 절치부심하면서 칼을 갈아오던 노장 선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라카와 시즈카의 인생경기 2006 토리노 올림픽 프리스케이팅

반면 미키는 계속해서 선수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다음 올림픽에서는 아라카와가 한 일을 자신이 이루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언론은 미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도착 직후 공항에서부터 올림픽에서의 부진을 물고 늘어지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언급하는 추악한 행태도 있었다(미키는 올림픽에서 연기한 쇼트프로그램이 돌아가신 아버지께 바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연기를 했냐고 비난이 거셌다고 한다). 대표 선발이 결정되기 전에 부상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도 비난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녀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기에 미키 자신도 어느 정도의 비판은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등돌림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었다. 아라카와가 그러했듯이 어린 나이에 출전한 올림픽에서 실패를 맛보았더라도 경험을 쌓고 다음 기회에 더 좋은 성적을 올릴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늘 화제거리를 찾고, 그 화제거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자신들의 매체의 판매율 혹은 구독률을 올리는 것에 목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을 "스타"가 필요한데 '미키가 여전히 그 스타성을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해서 누구도 자신할 수 없었다. 더이상 미키로는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녀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아라카와 이전, 일본 선수 중에서 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부문에서 입상은 이토 미도리 뿐이었는데, 이토는 여자 선수로는 고난이도인 트리플 악셀(피겨를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었을 단어. 그렇다. 아사다가 하느니 마느니 떠드는 그 기술이다)을 앞세워 은메달을 따냈다. 피겨의 연기에서 팔과 다리가 짧은 아시아권 선수들은 서양 선수들과 같은 아름다운 동작이 어려운 체형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고 대체로 표현력이 부족한 단점을 가지고 있어 예술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그런 면에서 김연아의 긴 팔과 다리, 그리고 뛰어난 표현력은 정말 대단한 축복이다). 그것을 극복하고 우위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다른 서양의 선수들이 구사하지 못하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아라카와는 이토조차 얻지 못했던 금메달을 획득의 과업을 이루었지만 결정적으로 "이토 미도리 = 트리플 악셀" 이란 등식처럼 아라카와 시즈카에게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일본은 "기술"이라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는 사회이며, 기술을 바탕으로, 기술을 중심으로 사회 모든 것이 발전해왔다. 전자회사, 자동차회사 모두 일본의 기술을 자랑하며, 심지어 작은 필기구까지도 기술을 내세워 광고하고 자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본의 기술" 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단지 산업 뿐만이 아닌 스포츠 경기에서도 기술의 우위를 자랑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기만족의 방식이었다. 그들이 바라던 것은 "세계의 어느 누구보다 위대한 기술을 가진 일본인 선수" 라고 치켜세울 수 있는 영웅이었고, 미키를 주목하고 응원하는 것을 넘어 국민적 아이돌처럼 만들어간 것은 올림픽 무대에서 그 누구도 아직까지 하지 못한 쿼드 살코를 성공시키는 새로운 일본인 스타 탄생에 대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미키가 더이상 쿼드 살코를 뛸 수 없음을 깨달아버렸다. 자연히 미키에 대한 언급이 줄어들고, 그녀에게 쏠린 관심을 돌릴 다른 대상을 찾기 시작한다. 미키티를 대체할 새로운 아이돌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새로운 아이돌은 그것은 "트리플 악셀"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가진 아사다 마오였다. 일본인이 좋아하는 둥근 얼굴형에 동그랗고 큰 눈, 차분한 말투와 성실한 연습 태도, 그리고 재능까지 갖춘 소녀, 그리고 그녀에게는 국민적인 감정을 끌어내기 좋은 한국의 동갑내기 라이벌도 있었다. 이제 미키티의 존재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한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듯이 미키티에 대한 관심은 식어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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