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번

대형 화면으로 중계되는 호주오픈 테니스 남자 4강 두 번째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서 페더레이션스퀘어로 돌아왔다. 전날 저녁에 열렸던 남자 준결승 1경기에서는 시드 배정을 받지 못했던 프랑스의 조 윌프레드 쏭가가 2번 시드의 라파엘 나달을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고, 톱시드인 로저 페더러와 노박 조코비치의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다. 

로저 페더러의 아버지 로버트 페더러는 스위스인, 어머니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탓에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모두 할 줄 안다고 한다. 가족끼리 대화할 때는 주로 독일어를 사용한다고 하며, 영어, 프랑스어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역시 언어는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 가장 좋고, 그 다음에는 본인의 재능과 노력이 좌우한다고 할 수 있겠다.

2006년의 페더러는 그랜드슬램의 모든 대회 결승에 올라서 프랑스오픈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그랜드슬램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각주:1] 페더러가 유일하게 무릎을 꿇었던 대회는 '흙신' 라파엘 나달과 맞붙은 프랑스오픈 결승전이었다. 호주에서 가장 인기있는 선수는 로저 페더러인데, 어머니가 국적은 남아공이지만, 영국계 혈통을 가진 백인이라는 이유도 있는 것 같고, 악바리같이 달려드는 나달에 비해 점잖게 경기를 하는 페더러의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페더러를 응원하게 된 것은 그의 치명적인 약점인 한 손 백핸드 스트로크 덕분이기도 한데, 최근에는 남자 선수들도 라켓을 두 손으로 잡고 치는 투핸드 백핸드 스트로크를 사용하는데, 원핸드 백핸드가 더 화려하고 치는 폼이 멋있게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광장에 앉아서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되는 경기를 본다. 이런 대형 스포츠 이벤트의 경우에는 스폰서 기업들에 할당되는 티켓이 많아서 코트에서 가까운 좌석은 티켓판매점에 가도 쉽게 구하기 어렵다. 티켓텍(Ticketek)이라는 회사에서 판매를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남자경기가 더 스피드가 있고 박진감이 넘치는데다 5세트 경기라서 경기 시간 역시 길기 때문에 저녁 세션은 이 경기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페더레이션 스퀘어에 모여서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되는 경기를 보고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경기가 펼쳐지고 있어서 그 곳에서 들리는 함성이 먼저 전해진다.

 

사진이 비뚤어졌는데 야간 촬영이라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고정을 하려다보니 이렇게 사진이 나왔다.

 

그래도 이 사진 하나는 건진 것 같다.

 

페더러는 1세트를 내준 뒤, 2세트에서도 힘없이 경기를 내주며 끌려가다가 3세트에 들어서서 간신히 리드를 잡았다. 페더러는 현재 스위스 출신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 아닐까 싶은데, 어디선가 스위스 출신 유명인 순위를 본 적이 있는데 페더러가 1위이고, 다른 사람들은 처음 접하는 이름이어서 뭐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스타니슬라브 바브린카가 순위권에 들지 않았을까도 싶다.

 

벼랑 끝에 선 페더러가 3세트에서 리드를 잡았다. 

그랜드슬램 남자 단식은 5세트까지 경기를 하므로 87년생인 조코비치가 체력적인 면에서 유리한 것도 있지만, 페더러의 경기 스타일은 테니스를 조금이라도 하거나 본 사람들이라면 코트를 넓게 쓰면서 상대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최대한 빨리 경기를 끝내고 체력 소진을 줄이려는 편이다. 


이 때만 해도 페더러가 3세트에서 반격을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조코비치가 뒤지고 있던 12번째 게임을 역전하여 6:6 동점을 만들고 타이브레이크에서 페더러를 이기고 세트스코어 3:0의 완승을 거두었다. 조코비치는 이틀 후에 펼쳐진 결승전에서 프랑스의 조 알프레드 총가를 이기고 생애 첫 그랜드슬램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후 노쇠화가 진행된 페더러와 고질적인 부상으로 발목이 잡힌 나달을 대신하여 한동안 세계랭킹 1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이후 한동안 부진을 겪기도 했지만, 아직 서른 살 밖에 되지 않아서 다시 세계랭킹 1위에 오를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전성기의 폼을 찾을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대회 직후 알려진 사실이지만, 페더러는 감염성 단핵구증이라는 질환에 걸려 컨디션이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팔자려니 해야할 것 같다. 프로 스포츠 선수가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면서 부진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 좋아보이지는 않고,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다음에 더 잘 하겠다고 하는 것이 상대 선수와 응원하는 팬들에 대한 예의일 것 같다.


호스텔로 돌아가야 한다. 낮에는 땡볕이 내리쬐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서 밤이 되면 쌀쌀해지고, 야라 강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더욱 춥게 느껴진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은 옥상에서 술을 마시느라 방은 비어 있어서 일단 씻은 뒤에 옥상에 올라가서 함께 술을 마시며 떠들다가 들어와서 잠을 잤다.

  1. 2005년에도 페더러는 프랑스오픈 준우승을 제외하고는 3개의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했다. [본문으로]

호주는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시차는 크지 않지만, 1~2월에는 낮이 길어짐에 따라 활동시간이 길어진다. 멜번은 호주에서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해가 일찍 뜨고 일찍 지는 덕분에 오후 8시까지는 조명이 없이도 야외활동에 큰 무리가 없다. 여기에는 Daylight Saving Time(일광절약시간제)이라는 우리에게는 서머타임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시간변동제도의 영향이 있는데 10월 1일부터 익년 4월 1일까지 시드니가 위치한 뉴사우스웨일즈와 멜번이 위치한 빅토리아, 그리고 타즈마니아는 한 시간이 더 빨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는 한국과의 시차는 2시간이 된다. 이 시기보다 2년 후에 머물렀던 애들레이드가 있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는 평소에는 한국보다 30분 빠르고, 일광절약시간제가 실시될 때는 1시간 30분이 빠르다. 호주오픈이 열리는 이 시기는 당연히 일광절약시간제가 실시되고 있어서 오후 8시 전후까지 날이 밝다.


시내 구간을 무료로 탈 수 있는 시티 서클 트램이다.


멜번에는 트램마다 광고를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호주오픈 테니스가 열리는 기간 막바지에 오스트레일리아 데이(Australia Day)라는 호주의 중요한 국경일이 있다. 매년 1월 26일을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라고 하여 기념행사를 하는데, 한국식으로는 '호주의 날' 정도 되겠다. 당연히 국경일로 공휴일이며, 호주 전역에서 여러가지 축하 및 기념 행사가 열린다. 시기상 대개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의 막바지, 가장 관심이 가는 4강 또는 결승전이 열릴 때쯤과 겹친다.

 

경찰 언니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옆에는 친구들인가..

굉장히 자유로운 모습이다.

 

페더레이션 스퀘어

호주오픈이 열리는 시기에는 이 곳에서 스크린을 통해 경기를 볼 수 있고, 채널 7에서 거의 대부분의 호주오픈 경기를 생중계로 보여준다.


건너편에는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이 있다.
앞의 글에서 한 번 언급했던 것 같은데,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의 일부 장면이 이 도시를 배경으로 등장했다.

 

호주에도 SBS라는 방송국이 있다. 한국의 SBS와는 관계는 없는 곳이고, 호주가 다인종 국가가 되다보니 이런 소수인종 사람들의 호주 정착에 도움을 위해 만들어진 채널이라고 한다. 다양한 국가의 방송을 보여주며, 종종 한국의 프로그램도 이 채널을 통해 방송되기도 한다고. 나는 새벽 시간에 가끔 UEFA챔피언스리그 축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호주는 AFL이라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가 있는데, 얘네들이 풋볼이라고 부르는 이 경기는 미식축구와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것이 있는 정말 호주에서만 볼 수 있는 경기다. 한국에서 종종 NFL경기를 보기도 했지만, AFL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경기 규칙도 잘 모르겠고, 별 재미도 없고 해서 거의 안 보았다. 호주의 영어가 영국식 영어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의 예로 football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는데, 이 나라에서 football은 AFL을 의미하지, 4년에 한 번 월드컵이 열리는 FIFA주관의 그 11명이 뛰는 경기를 말하지 않고, soccer라고 한다. 그럼에도 다른 많은 부분에서는 영국식 영어 및 문화, 제도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지만, 미국의 영향도 상당히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발음이 영국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식인 것도 아니고 적당히 잡종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야라강(Yarra River)

호주오픈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종종 이 강에 뛰어드는 세레모니를 펼치기도 한다. 가뜩이나 더운 멜번의 날씨에 누구라도 강에 뛰어들고 싶겠지만, 이 강의 깊이가 평균 10~15m 정도 된다고 한다.

테니스 경기 일정이 저녁에 남자단식 준결승 경기가 있기는 한데, 남자경기 가격이 더 비싸기도 하고, 그나마 가격 면에서 저렴한 구역의 자리는 빈 자리가 없어서 그냥 페더레이션 스퀘어에 앉아서 대형 화면으로 봐야할 것 같다. 그렇다고 비싸게 팔리는 입장권을 구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대회 초반의 1라운드 경기는 저렴한 편에 속하지만, 시드 배정을 받은 톱랭커의 경기는 진작에 매진이 되었고, 학생비자를 가지고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출석률을 신경쓸 필요조차 없지만, 기껏 수업료를 내고 영어를 배운다고 하고 있기에 수업은 최대한 빠지지 않으려고 일정을 계획해서 여자 준결승 세션 하나만 구입을 했고, 오가는 것도 늦은 밤과 이른 아침 비행기로 예약을 했는데 토너먼트 대회에서 용케 샤라포바의 경기를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고..

지난 밤에 유럽 출신의 젊은 친구들과 옥상에서 술을 마시면서 놀고, 아침에는 네덜란드와 다른 유럽에서 온 녀석들을 따라서 보타닉 가든에 갔다. 쟤네들은 햇빛이 쨍쨍한 날씨에도 피부가 잘 타지 않는데, 나의 귀하디 귀하신 살갗은 이 정도의 햇빛에 노출되면 금방 벗겨지는지라 전신에 썬크림을 바르고 밖으로 나갔다.


흔히 네덜란드 사람들을 더치(Dutch)라고 부르는데, 프랑스나 영국 출신의 사람들보다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다. 프랑스인들은 콧대가 높고, 인종차별하는 것이 눈에 보이고, 더치들은 티를 내지 않아서인 것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잠깐 본 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겠지만..


그래도 멜번이라면 호주에서 시드니 다음가는 대도시인데 이렇게 한가롭다. 호주에서는 지역(주)에 따라서 12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 및 연말연시를 포함한 하계 방학에 들어가는데, 계절이 정반대라 그렇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들은 북반구의 북미와 서유럽처럼 크리스마스 전후부터 연초까지 긴 연휴를 보내는 곳이 많다. 호주가 있는 오세아니아 지역에서는 호주와 뉴질랜드 말고는 국제사회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미약하고, 그렇다고 반도의 어느 나라처럼 핵을 앞세운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얼레.. 사진이 흔들렸네..

 

이런 동상도 있다.


이런 한가로운 일상을 아시아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덕분에 호주에서의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고자 이민을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어린 시절부터 그 여유로움을 누리며 자라온 사람들과, 계속해서 학교와 회사 등에서 치열하게 버텨온 사람들의 모습이 같을 수는 없을 터.


멜번의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건물들. 금융, 회계업체들이 대부분인 듯하다. 호주에는 제조업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나마 식품, 그것도 육류나 유제품 가공업체들이 조금 규모가 있다 뿐이지, 공산품을 만드는 업체는 거의 없다. UGG부츠가 그나마 유명한가..


조정인가 카누인가..


호주의 한 가지 문제로는 복지가 좋은 편이어서 사람들이 굳이 공부나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라는데, 그래서 여전히 고급 인력들을 해외에서 수혈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 등에서 회계학을 전공하여 회계사가 되거나, IT관련학과를 졸업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북미보다는 아무래도 호주나 뉴질랜드 쪽의 문호가 넓고 인재 부족이 심해서 더 많은 기회가 있고, 정착하기 쉬운 편이라고 한다. 나는 애초에 이 곳에 거주할 생각은 거의 없었지만..


함께 보타닉 가든에 간 일행. 이름을 잊어버렸다..

 

햇빛이 쨍쨍해서 썬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라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굉장히 한가롭다.

 

스티븐이라는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청년. 얘들이 더 늙어보이기는 하지만, 대학을 몇 년 다녔고, 중간에 휴학도 하고, 군복무도 했기에 실제로는 내가 최소 서너 살 이상 많은 연장자가 되겠다. 그러나 이들과는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이름 부르고 존댓말이 없는 영어로 몇 마디씩 주고 받으면서 이야기를 하면 끝이다. 얘네들은 이렇게 햇빛에 몸을 노출해도 별 탈 없다는 것이 그저 부럽다.

 

새들도 편하게 쉬고 있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시간.


결혼식도 열리고 있다.

여기의 결혼식은 한국에서처럼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니다. 신랑, 신부가 정말 자신들의 결혼을 축하해 줄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불러서 소박하게 결혼식을 한다. 한국의 결혼식은 신랑, 신부의 부모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가 되어 축의금을 얼마나 해야 하는가 고민을 해야하는데, 사람 수는 적지만 정말 모두 즐겁게 이 결혼을 축복하고 즐기는 모습이라 부럽다.


혹시 모를 돌발 사태에 대비한 경호원도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술 마시고 깽판 치는 녀석들이 많아서 그런지경호원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자녀의 결혼이 부모의 행사인데 반해, 축하하러 온 부모를 제외하면 신랑, 신부와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서 결혼식을 한다고 한다.


작지만 실속있는 결혼식 같다. 한국에서라면 축하하는 마음은 별로 없지만 나중에 돌려받을 생각하고 축의금 보내려고 가는 경우도 많을텐데..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독서를 즐기기도 하고

 

중년 부부도 조용히 데이트를 하고 있다. 이런 모습 참 부럽다.


일행들과 함께 다시 야라강을 건너서 북쪽으로 간다. 나는 저녁 때 페더레이션 스퀘어에서 테니스 경기를 보려고 하는데, 이 친구들은 백패커스로 돌아가서 옥상에서 술을 마신다고 한다. '파티' 라고 하는데, 파티라는 것이 특별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으로 모여서 마시고 먹고 떠들면서 노는 것을 파티라 칭한다.


가는 길에는 구름이 끼어서 햇빛을 가려주니 시원하다. 바다가 멀지 않지만 건조한 기후라서 한국의 여름처럼 덥고 습한 날씨가 아니어서 햇빛만 피하면 지내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멜번은 1월에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5도 전후를 기록하는데, 호주에서도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호주의 날씨가 더워지고, 가뭄과 홍수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고.


플린더스 스트리트역

멜번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의 하나. 1854년에 건축되었다는 역사 깊은 건물이다. 아마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하다' 에서 나왔던 것 같은데.. 이 드라마가 방송되기 얼마 전에 입대하여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이었던데다, 전입 후에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면서 드라마를 보기는 커녕 잠잘 시간도 없었고, 여기에 갔을 때는 그 드라마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저 테니스와 그레이트 오션로드를 보기 위해서 갔기 때문에.

멜번 시내에는 여러 철도역이 있는데, 철도노선이 여러 개인데다가 운영하는 회사가 다르기도 해서 외부에서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은 헤매기 쉽다. 플린더스 스트리트역은 주로 멜번 근교의 지역으로 이어지는 열차를 타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브리즈번에서는 몇 번 열차를 타보기는 했지만 영 분위기가 별로인데, 멜번에서는 열차를 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 같다. 사실 땅이 워낙 넓은 나라인지라, 교외에 사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어서 집도 없고, 차도 없는 사람들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함께 왔던 네덜란드인들은 백패커스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나는 잠시 야라강 주변 야경 사진을 찍고, 페더레이션 스퀘어에서 남자 단식 준결승전을 보기 위해 남을 생각이어서, 밤에 호스텔에서 보자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Melbourne Diary] Prologue

2011. 7. 4. 15:53

호주 브리즈번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던 2008년 잠시 짬을 내어 호주오픈 관람 및 멜번 구경을 위해 짧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명색이 그랜드 슬램이라고 동네 축구 경기 보러 갔다오는 것과는 금액이 달랐지만 호주에 있는 동안이 아니면 평생 볼 일은 없겠다 싶어 큰 마음을 먹고 가진 돈을 거의 때려 부은 대형 프로젝트였다.

돈을 내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치는 누릴 수 없어 수업이 끝나면 주립 도서관에 쪼르르 달려가 컴퓨터를 예약하여 사용하면서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숙소를 찾아 이메일을 보내 예약을 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일부러 영어로 된 론리 플래닛 호주편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최신판이라도 가격 정보는 틀린 것이 많아서 별 도움은 안 되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여행을 하는 성격은 아니라 멜번 시내와 근교에 둘러볼 곳에 대한 정보는 차차 가면서 읽기로 하고 그냥 덮어 두었다. 실제로 가보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하고 계획을 짜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던 적이 많아서 상황에 맞추어 대처할 생각이었다. 그나마 잠잘 곳이라도 미리 찾아놓은 것이 다행.

<호주오픈>
세계 테니스 4대 그랜드 슬램 중의 하나로 1월 중순부터 말까지 약 2주 정도 사이에 열리는 토너먼트 대회. 장소는 호주 멜번에 있는 멜번 올림픽 공원 (Melbourne Olympic Park), 흔히 멜번 파크라고 불리는 곳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그랜드 슬램이라고 하지만, 아시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호주오픈 기간 중에는 주관 방송사인 채널 세븐은 거의 하루 종일 경기를 생중계 혹은 녹화로 지연 중계를 하기에 원없이 테니스 경기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수 있다. 호주오픈은 전년도 10월부터 티켓 판매에 들어가는데, 멀리 남반구에 따로 떨어져 있고 인구가 많지 않아서 티켓을 구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심지어 하이라이트인 남자부 결승 경기조차도 호주 선수 혹은 호주 사람들이 좋아하는 로저 페더러가 진출하지 않는 한 전날까지도 티켓이 남아있기도 한다. 다만 관전하기에 좋은 좌석은 기업용 좌석이나 투어 패키지용으로 할당되고, 개인에게는 많이 풀리지 않아서 제대로 경기를 보려면 일찍 구입해야 한다.

내가 구입한 표는 여자부 준결승 두 경기가 예정된 1월 24일 로드 레이버 아레나의 데이 세션 티켓이었다. 1라운드부터 단계별로 가격이 상승하는데 토너먼트의 특성상 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만 가능하지 확실하지 않아서 마음 먹고 티켓을 사기 어렵다. 경기의 일정은 전날 오후에야 발표가 되므로 어떤 선수끼리 대결하는지는 알 수 있어도 어느 시간대에 어느 경기장에서 맞붙게 될 지는 장담할 수 없다. 로저 페더러 정도 되면 대개 저녁 시간대에 메인 경기장인 로드 레이버 아레나의 경기로 편성되지만, 해당 시간대의 티켓 판매율이 좋으면 일부러 낮 시간대로 옮겨서 티켓 판매율을 높이기도 한다.

표를 산 날이 경기 6일 전인 1월 18일이었으니 6일 후에 벌어질 경기에서 어떤 선수를 보게 될 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여자부 경기이니 예쁜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대회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계속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마리아 샤라포바, 아나 이바노비치와 다니엘라 한투코바까지 4강에 진출하여 땡잡은 기분이었다.

일정은 경기 전날인 23일 저녁에 멜번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 29일 아침 첫 비행기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학생인만큼 수업을 빠지고 가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주말과 대체 휴일이 된 월요일 덕분에 3일의 연휴가 생겨 목요일과 금요일 수업만 빠지기로 했고, 돌아오는 29일은 화요일이지만 빨리 움직이면 점심 시간 이전에 수업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24일 아침에 일찍 가서 28일 늦게 돌아오는 것이 좋겠지만 비행기표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밤 늦게 도착해서 몇 시간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에 숙소에서는 4일만 잠을 자고 출발하는 날 밤과 돌아오기 전날 밤은 공항에서 보내기로 했다.


브리즈번 시내에서 공항까지 가려면 에어트레인이라 불리는 공항철도를 타는 것이 가장 싸고 안전한 방법이다. 여행자들이 머무는 숙소에 공항 셔틀(흔히 코치라고 부른다)이 다니기는 하지만 시간대를 정해서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저녁 퇴근 시간대에 걸려 차가 막히게 되면 비행기를 놓칠 위험이 있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자들이 많은 짐을 끌고 공항으로 갈 때는 문 앞까지 와서 싣고 가는 코치가 더 편하기에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 시내의 신문 판매소라든가 일부 호스텔 카운터 등에서 에어트레인 할인 티켓을 팔았다. 역에서 표를 살 때는 14달러를 내야 했는데 이 티켓은 13달러에 살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아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발품을 팔아 미리 사서 탈 필요가 있다. 다행히 묵던 호스텔 바로 옆에 있는 곳에서 이 티켓을 팔고 있어서 가는 길에 사서 갔다.


20분만에 공항까지 갈 수 있단다..


학교를 다녀와서 바로 짐을 챙겨 나오다보니 센트럴역에서 열차를 탈 때 시간이 빠듯한 편이었는데 열차가 중간에 몇 분 정도 신호에 걸려 정차하느라 늦을까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체크인을 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는데 다행히 탑승 수속 중이었다. 따로 맡긴 짐이 없었는데, 검은 천으로 싸인 삼각대를 보더니 그게 뭐냐고 물어본다. 일본어로는 생각이 나는데 영어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음. 트.. 트라이.. (뒤의 단어가 아 젠장...)" 라고 중얼거리자, "아, 트라이포드!" 패닉에 빠질 뻔한 순간 직원 아가씨가 구해준다. 고맙다. 그렇게 무사히 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한다. 그런데 검색대에서 조금 이상하다 싶은 것이 있으면 당사자의 동의 하에 짐을 뒤지는 경우가 있는데, 여행자 치고는 짐이 너무 초라한 덕분에 즉시 수색을 당했다. "이봐, 나쁜 사람 아니라고.." 이상한 물건이 나올 리는 없고 가볍게 끝이 났다.

브리즈번 공항 국내선은 콴타스와 버진 블루, 그리고 콴타스의 저가 브랜드인 젯스타 등이 취항하고 있다. 대형 항공사가 취항하지 않는 소도시를 전문적으로 취항하는 리저널 익스프레스 같은 곳도 있지만 비중이 적고, 이용자가 한정되어 있어서 별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아무래도 업무차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은 콴타스를 많이 타고, 그 다음으로 버진 블루, 젯스타를 이용하는 편이다. 버진 블루는 젯스타에 비해서 취항 편수가 많아서 이용 승객도 많은데, 콴타스는 저가 브랜드인 젯스타의 취항을 늘릴수록 고가 브랜드 콴타스의 승객마저도 젯스타를 이용하여 전체적인 수입이 줄어드는 자기 잠식의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멜번에는 공항이 두 개 있는데 멜번 공항이라고 부르는 툴라마린에 위치한 공항이 하나 있고, 시내에서 더 멀리 떨어진 질롱에 위치한 아발론 공항이 있다. 툴라마린의 멜번 공항은 국제공항과 함께 있어서 규모가 큰데, 도심까지는 약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브리즈번에서 멜번을 연결하는 노선 중 콴타스와 버진 블루는 툴라마린 공항에서 이착륙을 하는 반면, 젯스타는 공항세 절감을 위해 아발론 공항으로만 취항을 했다(나중에 젯스타도 브리즈번에서 툴라마린으로 가는 노선이 생긴다). 멜번이 초행길이기도 했지만 숙소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항이 툴라마린 공항이어서 여기로 가는 가장 싼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렇지만 한창 관광객들이 몰리는 시기인지라 세금 포함 164달러의 거금을 지불하여야 했다. 이 돈이면 일주일 동안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데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저질렀다.

 


호주 국내선 비행기표는 공항마다 항공사와 공항마다 조금씩 다른데 이렇게 우리나라 국내선과 마찬가지로 영수증을 인쇄할 때 쓰는 감열지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뽑아주기도 하고 국제선처럼 항공사 로고가 그려진 티켓 용지에 인쇄를 해주기도 한다. 비행 시간은 2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멜번은 일광 절약 시간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브리즈번보다 1시간이 빨랐다. 20시에 출발해서 23시 50분 도착 예정이니 9시간만 어떻게 공항에서 버티면 되었다. 공항에서 혼자 무엇을 하고 놀고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출발이 지연된단다. 만세!


호주의 국내선 비행기는 약 80% 정도의 정시 출발률을 기록하는데 콴타스와 버진 블루[각주:1]가 상위권에 있는 편이다. 이 두 항공사의 브리즈번에서 시드니, 멜번을 오가는 비행기는 항공사마다 거의 매 시간마다 있고, 호주의 양대 도시인 시드니와 멜번을 오가는 비행기는 거의 30분에 한 대 꼴로 비행기가 있다. 대개 대도시들을 오가는 비행기들은 하루에 양 도시를 여러 번 왕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착과 출발의 간격이 타이트해서 한 번 조금이라도 늦게 출발하게 되면 연쇄적으로 조금씩 늦어지면서 지연이 종종 발생한다.

그런데 호주 사람들은 지연이 발생하더라도 흥분하고 화내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간혹 극성맞은 사람들이 있어서 항의를 하기는 하지만, 정말 급한 사정이 아니면 대개 자신들의 할 일을 하면서 참고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질 급한 한국인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느긋한 삶을 사는 호주 사람들에게는 잠시 늦어지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여유가 있다. 화를 내고 항의를 해봤자 늦어진 비행기가 빨리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체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침착하게 비행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국제선보다 국내선 수요가 더 많다보니 국내선 터미널에도 서점과 카페, 그리고 음식점 등이 자리하고 있어서 시간을 보내기 어렵지는 않다. 어린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은 간단한 음식을 먹으러 다녀오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고 수트 차림의 중년 아저씨는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다. 커피 한 잔에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여유가 없는지라 미리 사 온 과자 한 봉지를 꺼내 먹으면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안내 방송이 들렸다. 나이 먹고 억지로 배우는 영어인지라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서 신경을 써야 한다. 곧 비행기가 도착하면 탑승을 시작할 것이니 미리 준비하고 있으란다. 조금 더 늦어도 되는데..

앞으로 <멜번 다이어리>에서는 호주오픈 관람과 필립 아일랜드,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 다녀온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다. 성능이 좋지 않은 카메라에 실력이 나쁜 사용자 덕분에 사진이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지만 혹시 멜번에 관심 있고 여행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Melbourne의 공식적인 한글 표기는 멜버른이지만 실제 호주에서는 그렇게 발음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멜번이라고 씁니다.

  1. 버진 블루는 현재 버진 오스트레일리아(Virgin Australia)로 바뀌었음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