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넹이냐 에나냐

테니스 경기를 대개 영어로 중계되는 방송을 통해 보면서 영어식으로 읽는 것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출신 국가 고유의 발음이 있을 터이니 그렇게 부르고 읽어도 되는지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여러 언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닌지라 선수의 경기 장면을 짧게라도 보거나 가이드나 대회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게 된 선수 이름의 철자는 알아도 어떻게 읽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서양에는 이민자 출신의 선수들도 많은데 이들의 이름은 모국의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새로 이민을 간 나라의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자신의 이름에 대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그대로 이름 읽는 법을 고수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새로 정착한 나라에 녹아들면서 사람들이 부르는대로 흘러가는 것을 좋아하는 선수가 있어서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할 지 모르겠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스펠의 이름을 쓰면서도 사람마다 다르게 부르기도 혹은 다르게 부르라기도 하는 판이니 직접 선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으면 어느 것이 맞는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라는 것.

 

호주에 있을 때 옐레나 도키치(Jelena Dokic)의 경기를 종종 보았는데, 실제 그녀의 경기를 로드 레이버에서 보기도 있었다. 도키치가 무서운 아이로 세계 테니스계에 등장해 마르티나 힝기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당시에는 유고슬라비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 호주로 이민을 와서 호주 국적으로 경기에 참가하고 있었다. 어쨌든 유고 출신 선수로 뛰던 시절에는 이 소녀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도킥이라 불러야 할 지 아니면 태생지인 유고 지역에서 불리는대로 도키치라고 불러야 할 지 모든 언론들이 고민을 하였던 적이 있다. 도키치 자신은 "도킥이라 부르든 도키치라 부르든 네 멋대로 하세요" 라고 했는데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도킥이라고 기재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그런데 2009년 호주오픈에서 부활하며 '호주의 희망' 으로 떠올랐던 도키치는 도키치라고 불러달라고 했던 것 같다. 반대로 크로아티아 출신의 호주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버나드 토믹(Bernard tomic)은 호주에서 성장해서인지 "토믹" 이라는 영어식 발음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선수의 이름을 사정을 모르는 제삼자가 부르기는 쉽지가 않다.

외래어 표기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잘 모르겠고, 개인적으로 이름과 지명은 최대한 소리나는 것과 가깝게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방식을 최대한 고수해볼까 하는데 외국 선수의 이름을 한글로 옮기다보면 발음 나는대로 옮기기가 쉽지만은 않다. 영국의 앤디 머레이의 경우 머레이가 아닌 머리가 더 비슷한 발음인데 그냥 앤디 머리라고 쓰면 병신 취급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 미국의 앤디 로딕만 하더라도 앤디 롸딕이라고 버터를 잔뜩 발라서 표기하면 재수없는 녀석이 되고 말 것이다. 이미 벨기에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프랑스계인 사람인 쥐스틴 에넹 역시 에넹이 아닌 에나와 가깝게 발음을 하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에넹이 사람들이 자신을 영어식으로 불러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다. 호주오픈에서 에넹이 승리를 거두자 인터뷰를 하는데(아마 짐 쿠리어였던 것 같지만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저스틴~" 하고 아주 영어식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에넹 역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인터뷰에 응했다. 어쩌면 도키치가 했던 말처럼 "네 멋대로 부르세요. 대신 나를 기억하세요"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폴란드계 덴마크인 캐롤라인 워즈니아키(Caroline Wozniacki) 역시 덴마크인은 '카롤리네 보스니아키' 라고 발음을 하고 어떻게 보면 핏줄이 닿은 폴란드식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국제 무대에서 통용되는 발음은 영어식인 캐롤라인 워즈니아키다. WTA의 발음 가이드에도 보스니아키가 아닌 워즈니아키(woz-nee-AK-ee)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경우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테니스에서 영어가 대세이기에 굳이 자신의 이름을 원어로 불러달라기보다는 대세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냐고 혼자서 지레짐작을 해본다. 우리나라의 언론에서도 한때 보즈니아키라고 하다가 워즈니아키로 쓰는 것도 이런 지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관련링크 : http://ko.forvo.com/word/caroline_wozniacki/ (덴마크인의 워즈니아키 이름 발음)

스위스 국적의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의 경우도 난감한 케이스다. 스위스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와 스위스 고유어인 래토-로만어까지 네 가지의 언어가 공식 언어인데 같은 이름을 놓고도 발음하는 법이 서로 다르단다. 그러나 페더러의 이름 로저는 남아공 출신의 어머니가 지어준 영어 이름이라고. 알면 알수록 복잡하다. 아~

관련링크 : http://ko.forvo.com/word/roger_federer/ (로저 페더러 이름의 독일식, 프랑스식 발음 비교)

재미있는 것은 역시 폴란드 출신으로 캐나다로 이민을 간 Aleksandra Wozniak 이라는 선수가 있는데, WTA 가이드에는 이 선수를 영어식이 아닌 폴란드식으로 보즈니악(VOZ-nee-ak)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에서는 영어식으로 워즈니악이라고 부른다는 것.

 


Predicto TV – Andy Roddick, Aleksandra Wozniak by Predicto_Mobile

 

ATP와 WTA에서 선수 이름 발음에 대한 가이드(Pronunciation Guide)를 발간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WTA의 가이드는 2011년 미디어 가이드에도 수록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지만, ATP의 가이드는 떠돌았다는 말은 있는데 막상 구글링을 해봤는데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가이드에 대한 평판도 좋지는 않으니 전부 믿을 것은 못 되는가보다.

 

위의 동영상은 각 나라 사람들이 자국 선수들의 이름을 읽어주는 것인데, 여기에도 발음이 틀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당 언어를 모르니 어느 것이 잘못되었는지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로는 가장 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테니스 선수는 아니지만 성룡(成龍)의 경우를 보면 중국어 발음대로 하면 '청룽' 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룡이 우리나라에 오면 '안녕하세요. 성룡입니다.' 라면서 자신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말을 한다. 자신의 나라에서 불리는 발음을 고집하지 않고 그 나라의 문화와 습성에 맞게 알아서 배려하는 모습이다. 성룡이라 부르든 청룽이라 부르든 크게 개의치 않듯이 테니스 선수들도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어떻게 부르든 개의치 않는다면 그냥 부르고 그렇게 읽어도 큰 지장이 없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지간하면 그나마 확실한 물증이 있는 WTA의 가이드에 따라서 선수의 이름을 표기하려고 한다. 언젠가는 에넹 대신 에나라고 쓰게 될지도 모른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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