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bourne Diary] Prologue

2011. 7. 4. 15:53

호주 브리즈번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던 2008년 잠시 짬을 내어 호주오픈 관람 및 멜번 구경을 위해 짧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명색이 그랜드 슬램이라고 동네 축구 경기 보러 갔다오는 것과는 금액이 달랐지만 호주에 있는 동안이 아니면 평생 볼 일은 없겠다 싶어 큰 마음을 먹고 가진 돈을 거의 때려 부은 대형 프로젝트였다.

돈을 내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치는 누릴 수 없어 수업이 끝나면 주립 도서관에 쪼르르 달려가 컴퓨터를 예약하여 사용하면서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숙소를 찾아 이메일을 보내 예약을 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일부러 영어로 된 론리 플래닛 호주편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최신판이라도 가격 정보는 틀린 것이 많아서 별 도움은 안 되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여행을 하는 성격은 아니라 멜번 시내와 근교에 둘러볼 곳에 대한 정보는 차차 가면서 읽기로 하고 그냥 덮어 두었다. 실제로 가보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하고 계획을 짜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던 적이 많아서 상황에 맞추어 대처할 생각이었다. 그나마 잠잘 곳이라도 미리 찾아놓은 것이 다행.

<호주오픈>
세계 테니스 4대 그랜드 슬램 중의 하나로 1월 중순부터 말까지 약 2주 정도 사이에 열리는 토너먼트 대회. 장소는 호주 멜번에 있는 멜번 올림픽 공원 (Melbourne Olympic Park), 흔히 멜번 파크라고 불리는 곳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그랜드 슬램이라고 하지만, 아시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호주오픈 기간 중에는 주관 방송사인 채널 세븐은 거의 하루 종일 경기를 생중계 혹은 녹화로 지연 중계를 하기에 원없이 테니스 경기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수 있다. 호주오픈은 전년도 10월부터 티켓 판매에 들어가는데, 멀리 남반구에 따로 떨어져 있고 인구가 많지 않아서 티켓을 구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심지어 하이라이트인 남자부 결승 경기조차도 호주 선수 혹은 호주 사람들이 좋아하는 로저 페더러가 진출하지 않는 한 전날까지도 티켓이 남아있기도 한다. 다만 관전하기에 좋은 좌석은 기업용 좌석이나 투어 패키지용으로 할당되고, 개인에게는 많이 풀리지 않아서 제대로 경기를 보려면 일찍 구입해야 한다.

내가 구입한 표는 여자부 준결승 두 경기가 예정된 1월 24일 로드 레이버 아레나의 데이 세션 티켓이었다. 1라운드부터 단계별로 가격이 상승하는데 토너먼트의 특성상 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만 가능하지 확실하지 않아서 마음 먹고 티켓을 사기 어렵다. 경기의 일정은 전날 오후에야 발표가 되므로 어떤 선수끼리 대결하는지는 알 수 있어도 어느 시간대에 어느 경기장에서 맞붙게 될 지는 장담할 수 없다. 로저 페더러 정도 되면 대개 저녁 시간대에 메인 경기장인 로드 레이버 아레나의 경기로 편성되지만, 해당 시간대의 티켓 판매율이 좋으면 일부러 낮 시간대로 옮겨서 티켓 판매율을 높이기도 한다.

표를 산 날이 경기 6일 전인 1월 18일이었으니 6일 후에 벌어질 경기에서 어떤 선수를 보게 될 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여자부 경기이니 예쁜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대회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계속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마리아 샤라포바, 아나 이바노비치와 다니엘라 한투코바까지 4강에 진출하여 땡잡은 기분이었다.

일정은 경기 전날인 23일 저녁에 멜번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 29일 아침 첫 비행기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학생인만큼 수업을 빠지고 가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주말과 대체 휴일이 된 월요일 덕분에 3일의 연휴가 생겨 목요일과 금요일 수업만 빠지기로 했고, 돌아오는 29일은 화요일이지만 빨리 움직이면 점심 시간 이전에 수업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24일 아침에 일찍 가서 28일 늦게 돌아오는 것이 좋겠지만 비행기표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밤 늦게 도착해서 몇 시간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에 숙소에서는 4일만 잠을 자고 출발하는 날 밤과 돌아오기 전날 밤은 공항에서 보내기로 했다.


브리즈번 시내에서 공항까지 가려면 에어트레인이라 불리는 공항철도를 타는 것이 가장 싸고 안전한 방법이다. 여행자들이 머무는 숙소에 공항 셔틀(흔히 코치라고 부른다)이 다니기는 하지만 시간대를 정해서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저녁 퇴근 시간대에 걸려 차가 막히게 되면 비행기를 놓칠 위험이 있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자들이 많은 짐을 끌고 공항으로 갈 때는 문 앞까지 와서 싣고 가는 코치가 더 편하기에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 시내의 신문 판매소라든가 일부 호스텔 카운터 등에서 에어트레인 할인 티켓을 팔았다. 역에서 표를 살 때는 14달러를 내야 했는데 이 티켓은 13달러에 살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아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발품을 팔아 미리 사서 탈 필요가 있다. 다행히 묵던 호스텔 바로 옆에 있는 곳에서 이 티켓을 팔고 있어서 가는 길에 사서 갔다.


20분만에 공항까지 갈 수 있단다..


학교를 다녀와서 바로 짐을 챙겨 나오다보니 센트럴역에서 열차를 탈 때 시간이 빠듯한 편이었는데 열차가 중간에 몇 분 정도 신호에 걸려 정차하느라 늦을까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체크인을 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는데 다행히 탑승 수속 중이었다. 따로 맡긴 짐이 없었는데, 검은 천으로 싸인 삼각대를 보더니 그게 뭐냐고 물어본다. 일본어로는 생각이 나는데 영어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음. 트.. 트라이.. (뒤의 단어가 아 젠장...)" 라고 중얼거리자, "아, 트라이포드!" 패닉에 빠질 뻔한 순간 직원 아가씨가 구해준다. 고맙다. 그렇게 무사히 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한다. 그런데 검색대에서 조금 이상하다 싶은 것이 있으면 당사자의 동의 하에 짐을 뒤지는 경우가 있는데, 여행자 치고는 짐이 너무 초라한 덕분에 즉시 수색을 당했다. "이봐, 나쁜 사람 아니라고.." 이상한 물건이 나올 리는 없고 가볍게 끝이 났다.

브리즈번 공항 국내선은 콴타스와 버진 블루, 그리고 콴타스의 저가 브랜드인 젯스타 등이 취항하고 있다. 대형 항공사가 취항하지 않는 소도시를 전문적으로 취항하는 리저널 익스프레스 같은 곳도 있지만 비중이 적고, 이용자가 한정되어 있어서 별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아무래도 업무차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은 콴타스를 많이 타고, 그 다음으로 버진 블루, 젯스타를 이용하는 편이다. 버진 블루는 젯스타에 비해서 취항 편수가 많아서 이용 승객도 많은데, 콴타스는 저가 브랜드인 젯스타의 취항을 늘릴수록 고가 브랜드 콴타스의 승객마저도 젯스타를 이용하여 전체적인 수입이 줄어드는 자기 잠식의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멜번에는 공항이 두 개 있는데 멜번 공항이라고 부르는 툴라마린에 위치한 공항이 하나 있고, 시내에서 더 멀리 떨어진 질롱에 위치한 아발론 공항이 있다. 툴라마린의 멜번 공항은 국제공항과 함께 있어서 규모가 큰데, 도심까지는 약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브리즈번에서 멜번을 연결하는 노선 중 콴타스와 버진 블루는 툴라마린 공항에서 이착륙을 하는 반면, 젯스타는 공항세 절감을 위해 아발론 공항으로만 취항을 했다(나중에 젯스타도 브리즈번에서 툴라마린으로 가는 노선이 생긴다). 멜번이 초행길이기도 했지만 숙소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항이 툴라마린 공항이어서 여기로 가는 가장 싼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렇지만 한창 관광객들이 몰리는 시기인지라 세금 포함 164달러의 거금을 지불하여야 했다. 이 돈이면 일주일 동안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데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저질렀다.

 


호주 국내선 비행기표는 공항마다 항공사와 공항마다 조금씩 다른데 이렇게 우리나라 국내선과 마찬가지로 영수증을 인쇄할 때 쓰는 감열지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뽑아주기도 하고 국제선처럼 항공사 로고가 그려진 티켓 용지에 인쇄를 해주기도 한다. 비행 시간은 2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멜번은 일광 절약 시간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브리즈번보다 1시간이 빨랐다. 20시에 출발해서 23시 50분 도착 예정이니 9시간만 어떻게 공항에서 버티면 되었다. 공항에서 혼자 무엇을 하고 놀고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출발이 지연된단다. 만세!


호주의 국내선 비행기는 약 80% 정도의 정시 출발률을 기록하는데 콴타스와 버진 블루[각주:1]가 상위권에 있는 편이다. 이 두 항공사의 브리즈번에서 시드니, 멜번을 오가는 비행기는 항공사마다 거의 매 시간마다 있고, 호주의 양대 도시인 시드니와 멜번을 오가는 비행기는 거의 30분에 한 대 꼴로 비행기가 있다. 대개 대도시들을 오가는 비행기들은 하루에 양 도시를 여러 번 왕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착과 출발의 간격이 타이트해서 한 번 조금이라도 늦게 출발하게 되면 연쇄적으로 조금씩 늦어지면서 지연이 종종 발생한다.

그런데 호주 사람들은 지연이 발생하더라도 흥분하고 화내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간혹 극성맞은 사람들이 있어서 항의를 하기는 하지만, 정말 급한 사정이 아니면 대개 자신들의 할 일을 하면서 참고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질 급한 한국인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느긋한 삶을 사는 호주 사람들에게는 잠시 늦어지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여유가 있다. 화를 내고 항의를 해봤자 늦어진 비행기가 빨리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체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침착하게 비행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국제선보다 국내선 수요가 더 많다보니 국내선 터미널에도 서점과 카페, 그리고 음식점 등이 자리하고 있어서 시간을 보내기 어렵지는 않다. 어린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은 간단한 음식을 먹으러 다녀오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고 수트 차림의 중년 아저씨는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다. 커피 한 잔에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여유가 없는지라 미리 사 온 과자 한 봉지를 꺼내 먹으면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안내 방송이 들렸다. 나이 먹고 억지로 배우는 영어인지라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서 신경을 써야 한다. 곧 비행기가 도착하면 탑승을 시작할 것이니 미리 준비하고 있으란다. 조금 더 늦어도 되는데..

앞으로 <멜번 다이어리>에서는 호주오픈 관람과 필립 아일랜드,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 다녀온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다. 성능이 좋지 않은 카메라에 실력이 나쁜 사용자 덕분에 사진이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지만 혹시 멜번에 관심 있고 여행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Melbourne의 공식적인 한글 표기는 멜버른이지만 실제 호주에서는 그렇게 발음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멜번이라고 씁니다.

  1. 버진 블루는 현재 버진 오스트레일리아(Virgin Australia)로 바뀌었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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