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 술기운을 빌려 잠을 자려고 한 잔 정도 마신다거나, 식사 자리에서 상대방에 맞춰주기 위해서 함께 첫 잔을 마시는 것 외에는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갈수록 멍청해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어 다시 회복은 되지 않더라도 그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다보니 술 냄새가 싫어지고 거부감을 느끼게 되어 자연히 술을 멀리하게 되었다. 와인 한 잔씩 마시면 혈액순환에 좋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어떤 연구에서는 술이라는 자체가 한 잔도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사람의 건강상태나 체질에 따라 괜찮거나 도움이 될 수도, 반대로 나쁘거나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싶다.

그런 의학적인 연구 내용이 아니더라도 과로로 인한 만성피로와 체력저하가 고질병처럼 되면서 마실 때는 괜찮은 것 같은데 쉽게 취하고 숙취로 다음 날이 괴로운 것이나 술자리에 함께 한 사람이 술에 취해 개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예전에는 저렇게 개가 되었구나 싶은 생각에 스스로를 단속하려는 뜻도 있고, 여러 이유에서 술을 멀리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이래놓고 나서 언제 또 술 한 잔 마시다 취해서 멍멍이짓을 할 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이든 출장이든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 있는 순간에는 어느 정도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되도록 더 조심하고 주의한다. 그러다보니 저녁을 먹은 뒤에는 호텔 방 안에서 텔레비전을 본다거나, 인터넷 웹서핑을 한다거나 기껏해야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다가 먹는 것 외에는 마땅히 할 일이 없다. 게임이나 뭐 그렇고 그런 것이라든지 할 일이야 많이 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런 방면에 별로 흥미가 없어서, 북오프 같은 중고서점에 가서 싸고 괜찮은 책을 둘러보거나 쇼핑을 한다거나 가까운 온천을 찾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오는 정도랄까.

오후 8시가 다 되어가니 멀리 갔다 올 수는 없고, 편도 한 시간 이내에 갈 수 있을 만한 곳에 내려서 잠시 구경하고 교토에 돌아오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아 킨테츠교토역으로 갔다. 킨테츠교토역은 한 쪽이 막힌 역이어서 반대 방향으로 갈 염려는 없지만, 가는 도중 노선이 분기되어 목적지가 다른 열차가 종종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다만 특급을 포함한 모든 등급, 모든 방면의 열차가 정차하는[각주:1] 야마토사이다이지(大和西大寺)역에서 오사카와 나라, 카시하라진구마에(橿原神宮前) 방면으로 분기되니 이 역까지는 걱정하지 않고 갈 수 있다. 어차피 시간상 사이다이지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10시가 훌쩍 넘을테고, 다음 날 체크아웃을 해야하니 늦잠을 잘 수 없어서 무리하지 않아야 한다.


교토선에는 주로 4량 편성인 경우가 많아 열차를 병결하여 운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열차의 열차 모델 및 연식이 다르다.

거리상 특급권을 쓰기 아까우니 특급열차 대신 19시 46분 발 카시하라진구마에 행 급행열차에 탔다. 배가 부르니 잠이 오고, 앉아서 가면 좋겠지만 이미 사람들이 많이 타 있어 서서 간다. 밖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간다. 30여 분 걸려서 야마토사이다이지에 도착하자 꽤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오사카와 교토를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 많지만, JR, 한큐(阪急)는 오사카 북부와 교토를 연결하고, 케이한(京阪) 역시 오사카 북동부 방면 중심으로 교토에 이어지는 노선이어서 교토에서 나라를 거쳐 오사카 남부를 바로 연결하는 노선은 킨테츠가 유일하다. 킨테츠의 통학 정기권의 가격이 다른 회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하다던데, 그래서인지 직장인 외에도 학생들도 꽤 있다. 그러고 보니 우지에 살던 친구 녀석도 몇 년 전에 오사카에 통학하느라고 킨테츠를 이용했던 것이 생각난다.

사이다이지역은 교토선, 카시하라선과 나라선이 교차하는 지점인데, 동쪽의 나라, 서쪽의 오사카, 남쪽의 카시하라진구마에, 북쪽의 교토로 가는 노선이 교차하니 사거리와 같은 곳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아주 서울의 신촌이나 대학로 정도 같이 번화한 동네는 아니지만 나라현에서는 꽤 비중이 있어 나라역 주변이 나라현의 중심이라면 이 곳은 현 내의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겠다. 예전에 이 역을 몇 번 지나간 적은 있지만, 사이다이지역 주변에 유명한 관광 명소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역사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처음이다.

역 바깥에는 나라 패밀리라는 쇼핑센터가 있어 전문 상점이 들어서 있고, 같은 건물 북쪽에 킨테츠백화점과 이온몰(AEON MALL)이 자리하고 있다. 추측이지만 나라패밀리라는 건물의 일부를 킨테츠백화점과 이온몰이 임대하여 영업하고 있는 것 같다. 킨테츠백화점은 오후 8시까지만 영업을 하는지라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다가 이온몰은 아직 영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간식거리를 사러 들어갔다.


사진 출처 http://www.nara-kintetsu-chintai.jp
이미 한밤중이 되어 사진을 찍어도 잘 안 나와서 부득이하게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다.
사이다이지역 북쪽 출구로 나가면 오른쪽에 이 건물이 보여서 찾기 어렵지 않다.


아무래도 외지에 있다보면 밥은 잘 챙겨먹더라도 균형잡힌 식사를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종종 의식적으로 마트나 편의점에 들러 쥬스라든가 껍질을 쉽게 벗겨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조금씩 사먹는 편이다. 평소에는 영양성분 같은 것을 생각하며 음식을 먹지 않고 편식에 가까울 만큼 좋아하는 것만 먹지만, 외지에서 몸이 아프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 주의하는 정도. 이온몰에는 대개 수퍼마켓이 있으니 쥬스와 과일을 사러 지하로 연결되는 입구를 찾아서 들어갔다.


발렌타이데이와 맥주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9년 전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일본어를 거의 못해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였지만, 그 당시에도 밸런타인데이 전이어서 상점에서 밸런타인데이 관련 상품으로 초콜릿과 주류를 파는 곳이 많았다. 그 때 이 나라의 상술은 참 뛰어나다고 감탄하기도 하였는데, 맥주까지 이렇게 밸런타인데이라고 포장을 특별히 만들어 파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술 한 잔 마시면 더 쉽게 상대에게 친밀함을 느낄 수 있어서인가.

일본에서도 대부분의 마트에서는 폐점 시각이 다가오면 신선 식품이나 소비기한이 짧은 조리 식품 등을 할인가격에 파는데, 사람들이 다 사서 간 뒤라 식료품 코너에는 먹을만한 것이 없고, 과일도 꽤 비싸서 살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딸기가 큼지막한 것이 맛있게 보이는데 몇 개 되지 않는 작은 포장이 6천원이 넘어서 망설이다가 포기하고 방울토마토를 샀다. 그리고 마시는 요거트도 하나 사서 쪽쪽 빨아마시고..


부족분의 식물섬유 마시는 요구르트 석류맛.

유제품 귀신인지라 맛있게 먹었다.

밖으로 나와서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는데 생각했던 만큼 거리에 상점이 많지 않고, 갈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맛있는 냄새라도 풍기면 들어가서 먹고 나올텐데 먹자골목이라 불릴 만한 곳은 없는지 거리가 썰렁하다. 역의 남쪽에는 수퍼마켓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건너가기 귀찮다. 그럼 그냥 돌아가야지 별 수 있나. 사이다이지역으로 돌아가서 교토행 열차를 기다린다. 이번에도 당연히 추가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급행열차인데 갈 때와는 달리 빈 자리가 많아서 편히 앉아서 간다. 교토역이 종점이니 마음 편히 잠을 자도 괜찮은데, 이렇게 긴장감이 없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이건 무슨 청개구리 심보냐.


사토미가 모델인 이온 영어회화 광고.

그렇지만 여기서 이 학원을 다닌다고 해도 이 아가씨 볼 일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시 교토역에 도착한 뒤, 호텔에서 나올 때 길바닥에서 주운 버스 1일 승차권을 가지고 버스를 타고 호텔 앞에서 내렸다. 누가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버스 탈만큼 탔다고 버리고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2월 5일 날짜가 찍혀 있는 승차권이라 혹시 몰라서 주워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유용하게 잘 썼다. 그게 없었더라면 20분 동안 걸으면서 궁시렁거렸을텐데, 역시 돈이 좋기는 좋다. 승차권 버리고 가신 분 복 받으실 거에요~~♪


그래도 움직였다고 배가 고프니 야식을 먹어야지.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야키우동과 야키토리를 데워서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체크아웃을 해야하니 대충 짐을 싸둔 뒤 씻고 잠을 청했다.

  1. 심야시간에는 교토발 열차가 야마토사이다이지까지 운행하지 않고, 신타나베(新田辺)까지만 가는 열차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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