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오픈 2011 늦은 프리뷰

2011. 8. 31. 19:30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윔블던 이후 잠시 블로그를 버려둔지가 어느덧 두 달이 지나서 벌써 US오픈이 개막하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테니스 경기가 한창 진행중일 때 잠시 여유가 생기는지라 짬짬이 경기 리뷰와 관련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그동안 포스팅하지 않은 것들은 시간이 된다면 대회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올리도록 일단 노력은 해야겠다. (블로깅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라서 장담은 할 수 없고..)

테니스팬들이라면 윔블던이 끝난 7월 초중반은 유럽에서 작은 클레이코트 대회들이 열리는데 상금의 규모는 물론 랭킹 포인트 역시 크지 않아 대개 윔블던에서 진을 뺀 정상급 선수들은 잠시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 되고, 다른 선수들이 상금과 포인트를 얻는 기회가 된다. 7월말부터 미국과 캐나다에서 본격적인 하드코트 시즌이 시작하게 되는데, 메이저대회 바로 밑에 위치한 큰 투어가 열리면서 상위권 선수들도 슬슬 대회에 나서며 US오픈을 위한 워밍업을 시작한다.

남자부에서 중요한 대회라고 한다면 ATP 마스터스 1000의 큰 대회인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로저스컵과 미국 신시내티에서 열리는 W&S오픈인데 월드 넘버 원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와 앤디 머리(영국·4위)이 서로 나누어 타이틀을 가져갔다. 조코비치는 윔블던 우승 직후 데이비스컵에서 복식 경기에 참가한 것을 빼고는 오랜 휴식을 가지다 한 달만에 코트에 돌아와 로저스컵에 참가하여 우승했는데, 1993년 피트 샘프라스(미국) 이후 세계랭킹 1위에 오른 후 출전한 첫 ATP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기세를 몰아 W&S오픈까지 노리던 조코비치는 결승에서 머리를 만나 고전하다가 기권하면서 시즌 두 번째 패배를 기록했다. 휴식 없이 연속으로 대회에 참가하면서 누적된 피로와 가벼운 어깨의 이상이 기권의 이유였는데 1세트를 먼저 내주며 출발이 좋지 않았던데다 2세트에서도 0-3으로 끌려가면서 경기를 이길 가능성이 적어지면서 US오픈을 바라보면서 일찌감치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US오픈으로 돌아오면 이 대회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골프의 메이저대회와 종종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1881년에 첫 대회가 시작하여 1877년에 시작한 윔블던 다음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회이며 중간에 세계대전 등으로 중단되기도 해서 올해 130회째가 열린다. 1987년부터는 테니스 4대 메이저대회 중에서 그 해의 가장 마지막에 열리는 것으로 정해지면서 8월 말부터 9월 초중순 사이에 열리는 것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올해는 허리케인 아이린의 영향으로 미국이 피해를 보았지만 이 대회의 정상적인 진행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올해는 8월 29일부터 9월 11일(현지시간)까지 2주일간 경기가 진행되며, 대회에 앞서 23일부터 26일까지 4일간 퀄리파잉 매치가 진행되었다. 올해 총상금은 2370만 달러이고 남녀 단식 우승자는 180만 달러를 받게 되며, US오픈에 앞서 벌어지는 US오픈 시리즈 대회에서 얻은 포인트를 합산하여 최고 100만 달러의 보너스 상금을 준다. 이 보너스 상금의 주인공은 미국의 마디 피쉬(8위)와 서리나 윌리엄스(27위)다.

작년 대회에서 준우승에 그쳤던 조코비치는 생애 첫 US오픈 우승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올해 57승 2패의 경이적인 승률을 자랑하는 조코비치의 상승세에 비해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천재" 라파엘 나달(스페인·2위)과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3위)의 여름 성적표는 초라하였다. 나달은 로저스컵과 W&S오픈에서 각각 32강, 8강에서 탈락하였고, 페더러도 같은 대회에서 16강, 8강에서 침몰하며 US오픈 전망을 어둡게 하였다. 그러나 남자 테니스에서 여전히 빅4 체제가 무너지지 않고 있고, 5세트 경기에 긴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메이저대회의 특성과 큰 대회에서 경기를 하는 부담감 등을 고려할 때 여전히 이들이 조코비치의 가장 큰 견제 세력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전년도 우승자인 나달은 이번 대회에서 타이틀을 방어하지 못할 경우 조코비치와의 랭킹포인트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 3위 페더러와의 격차도 줄어들며 연말 랭킹 2위를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어서 이번 대회가 중요하다. 페더러에게는 이번 대회가 2003년부터 매년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한 개 이상 차지해온 기록을 이어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큰 대회 울렁증에 시달리는 앤디 머리 역시도 이제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라 치열한 접전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자부는 디펜딩 챔피언 킴 클레이스테르스(벨기에·3위, a.k.a. 킴 클리스터스)가 불참한 가운데 세계랭킹이 27위까지 내려갔지만 뱅크 오브 웨스턴 클래식과 로저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부활을 알린 서리나 윌리엄스가 여전히 강력한 우승후보이며, 들쑥날쑥한 경기력을 보이면서도 W&S오픈 우승을 차지한 마리아 샤라포바(러시아·4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세계랭킹은 굳건한 1위이지만 큰 대회 울렁증을 극복하지 못하며 디나라 사피나(러시아)의 재림이 아닌가 싶기도 한 카롤리네 보스니아키(덴마크, a.k.a. 캐롤라인 워즈니아키)의 활약은 두 우승 후보의 행보에 변수가 될 수도 있다. 대회 개막 직전의 뉴 헤이븐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올해 열린 메이저대회마다 전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서도 일찌감치 물을 먹었던 전례가 있는지라 큰 의미는 없는 듯하다. 오히려 로저스컵과 W&S오픈 2라운드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적표 덕분에 톱시드를 받아 유리한 대진임에도 큰 기대는 되지 않는다. 윔블던 여왕 페트라 크비토바(체코·7위)는 한 달 휴식 후 참가한 로저스컵과 W&S오픈에서 연속으로 16강에서 탈락하면서 페이스가 많이 떨어져 있어 역시 전망이 밝지는 않다고 적으려고 했는데 29일(현지시간)에 열린 1라운드에서 가볍게 탈락해버렸다. 이미 노쇠한 기미가 역력한 비너스 윌리엄스는 랭킹이 36위까지 떨어지고 시드 배정조차 받지 못했지만 관록과 자국에서 경기가 치르는 홈의 이점을 안고 있어 우승은 어렵더라도 우승을 노리는 선수들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며 물귀신 놀이를 할 수 있다.

프리뷰라면 대회 시작 전에 글을 썼어야 하는데 조금 늦었지만 사진 몇 장과 함께 간략하게 마무리하고 이어지는 글에서 29일과 30일에 열린 경기 결과를 전하도록 하겠다.

서브 연습을 하고 있는 로저 페더러 ⓒ Andrew Ong/usopen.org

큰 대회 울렁증이라면 역시 빠질 수 없는 앤디 머리 ⓒ Phil Hall/usopen.org

나달은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테니스 클리닉을 열었다고 ⓒ Jennifer Pottheiser/usopen.org


 



지난 2주간 윔블던 관련 포스팅을 하면서 주로 남녀 단식에 초점을 맞추어 주요 경기 리뷰를 했는데, 중간에 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잠시 풀어놓는 것으로 철야 투쟁을 멈추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려고 한다.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많은 이들이 찾아주셔서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다.

조코비치와 크비토바는 모두 윔블던 우승 첫 경험 ⓒ AELTC / T. Lovelock

단식 경기의 우승 상금은 우승자 110만 파운드(약 18억 9천만 원)이고, 준우승 상금은 55만 파운드(약 9억 4천만 원). 윔블던에서 한 번 우승하면 상금만으로도 평생 먹고 살 돈이 마련되는 셈이다. 3라운드 탈락자까지는 한 단계 내려갈 때마다 개인이 수령하는 상금은 반으로 줄어드는데, 128명이 맞붙는 1라운드에서 패한 64명이 각각 수령하게 되는 상금이 11,500파운드로 2천만원에 가까운 돈이니 이것만 해도 대단하다. 퀄리파잉 1라운드에서 탈락해도 1,750파운드(약 3백만 원)가 주어지니 비행기삯 정도는 충분히 뽑을 수 있는 돈이다.

크비토바도 이번 대회 우승으로 7월 4일자 세계 랭킹에서 7위로 한 단계 상승했다. 이번 시즌 레이스만 놓고 보면 보스니아키(5776점)에 조금 뒤진 2위(5037점)를 달리고 있어 남은 시즌 경기 결과에 따라 연말 랭킹 1위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준우승자인 샤라포바도 랭킹이 한 단계 상승한 5위가 되었고, 4위였던 리나가 6위로 내려앉았다.

오픈 시대의 대기록을 세운 브라브라 ⓒ AELTC / M. Hangst

복식은 동성의 경우 우승 상금이 25만 파운드(약 4억 3천만 원), 혼성의 경우 9만 2천 파운드(약 1억 6천만원)가 한 조에 주어지는데, 어느 한 사람이 더 가져가서 서로 싸우는 일은 없는 것 같다. 남자 복식의 브라이언 브라더스(미국)는 11번 째 그랜드 슬램 우승으로 우디즈와 타이기록을 세웠다. 다른 선수들처럼 파트너의 변동없이 수년 째 정상을 지켜온 브라브라가 조만간 새로운 기록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여자 복식은 현재 가장 강한 복식조인 크베타 페스츠케(체코)와 카타리나 스레보트닉(슬로베니아)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자비너 리지키(독일)와 사만다 스토서(호주)가 하루에 준결승과 결승을 치르느라 체력 소모가 커서 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알프스 소녀였던 힝기스가 알프스 아줌마가 되어버린 세월의 무상함이여 ⓒ AELTC / S. Wake

윔블던에서는 인비테이셔널 매치라고 해서 전 윔블던 챔피언들이 초청되어 복식 경기를 갖는데 여자 복식결승에서 린제이 데이븐포트(미국)와 마르티나 힝기스(스위스)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미국)와 야나 노보트나(체코)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아무래도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팔팔한 젊은 선수들이 더 잘 뛸 수밖에 없다. 이 경기에서도 작지만 상금(우승 17,500파운드, 준우승 14,500파운드)이 있다고. 젊었을 때 테니스 잘 치면 나이 들어서도 먹고 살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샤라포바 이전에 윔블던의 연인은 힝기스였는데.. ⓒ AELTC / S. Wake

힝기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시 이야기하자면 뛰어났던 테니스 실력 이외에도 여러 스타들과 염문을 뿌리기로 유명했다. 스페인의 프로 골퍼 세르히오 가르시아, 영국의 축구 선수 솔 캠벨, 테니스 선수 라덱 스테파넥 등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는데 작년에 6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의 테니스 실력은 그저 그렇더라는 (현재 세계랭킹 31위에 올라 있다) ⓒ AELTC / S. Wake

윔블던은 여전히 흰색 유니폼을 입도록 하는 규정이 있는데, 꼭 튀고 싶은 선수들이 유니폼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베타니 마텍-샌즈는 코트의 레이디 가가 패션을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비너스의 경기복이 더 충격적이었다.

비너스의 쇼킹 경기복 ⓒ AELTC / S. Wake

비너스는 흑인이다보니 흰색은 그다지 잘 받지 않음에도 옷에 장난을 너무 친 것 같다. 그냥 깔끔한 경기복을 입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너스는 자신의 유니폼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범인의 눈으로 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서리나의 인터뷰 모습 ⓒ AELTC / T. Lovelock

사실 그 동생이 인터뷰할 때 입고 나온 셔츠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찢어진 옷을 입은 것은 아닐테고 어느 정도 예의는 지켜야 하는데 이 자매는 너무 파격을 즐긴다.

그 밖에 여러 유명 인사가 윔블던 경기장을 찾아서 화제가 되었다. 영미권 언론에서는 케이트 미들턴의 동생 피파 미들턴에 대해서 난리를 치고 있는데 이해할 수 없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과감하게 그녀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아는 사람들만 잠시 소개해본다.

호주의 백상어 그렉 노먼씨께서 오셨습니다 ⓒ Getty Images / Julian Finney

F1 스타 마크 웨버도 경기를 관람했다 ⓒ Getty Images / Clive Mason

래퍼 Jay-Z씨도 멀리 대서양을 건너 영국까지 와서 경기를 보았다. ⓒ AFP Photo / Glyn Kirk

루퍼트 그린트와 올리버 펠프스 ⓒ Getty Images / Julian Finney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 출연했던 론 역의 루퍼트 그린트와 조지 역의 올리버 펠프스도 경기를 보았다고 하는데, 원하는 사람은 이들이 아닌 엠마 왓슨인데 어흑!

아쉬움을 앤양으로 달래보자 ⓒ Getty Images / Julian Finney

앤 해서웨이는 애인 아담 슐만과 함께 여자 결승전 경기를 관람하였다. 이 아가씨 프라다를 입는 악마였을 때 참 예쁘게 나왔는데 그 이후 영화에서는 강한 인상을 남겨주지 못해 아쉽다.

윔블던은 끝나도 ATP와 WTA 투어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매일 밤을 새우며 경기를 지켜볼 수는 없어서 당분간 테니스 리뷰는 가끔 시간이 날 때만 포스팅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쉽지만 이제부터 매주 테니스의 공주 한 명씩 골라서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계획이니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린다.

[Melbourne Diary] Prologue

2011. 7. 4. 15:53

호주 브리즈번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던 2008년 잠시 짬을 내어 호주오픈 관람 및 멜번 구경을 위해 짧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명색이 그랜드 슬램이라고 동네 축구 경기 보러 갔다오는 것과는 금액이 달랐지만 호주에 있는 동안이 아니면 평생 볼 일은 없겠다 싶어 큰 마음을 먹고 가진 돈을 거의 때려 부은 대형 프로젝트였다.

돈을 내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치는 누릴 수 없어 수업이 끝나면 주립 도서관에 쪼르르 달려가 컴퓨터를 예약하여 사용하면서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숙소를 찾아 이메일을 보내 예약을 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일부러 영어로 된 론리 플래닛 호주편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최신판이라도 가격 정보는 틀린 것이 많아서 별 도움은 안 되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여행을 하는 성격은 아니라 멜번 시내와 근교에 둘러볼 곳에 대한 정보는 차차 가면서 읽기로 하고 그냥 덮어 두었다. 실제로 가보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하고 계획을 짜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던 적이 많아서 상황에 맞추어 대처할 생각이었다. 그나마 잠잘 곳이라도 미리 찾아놓은 것이 다행.

<호주오픈>
세계 테니스 4대 그랜드 슬램 중의 하나로 1월 중순부터 말까지 약 2주 정도 사이에 열리는 토너먼트 대회. 장소는 호주 멜번에 있는 멜번 올림픽 공원 (Melbourne Olympic Park), 흔히 멜번 파크라고 불리는 곳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그랜드 슬램이라고 하지만, 아시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호주오픈 기간 중에는 주관 방송사인 채널 세븐은 거의 하루 종일 경기를 생중계 혹은 녹화로 지연 중계를 하기에 원없이 테니스 경기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수 있다. 호주오픈은 전년도 10월부터 티켓 판매에 들어가는데, 멀리 남반구에 따로 떨어져 있고 인구가 많지 않아서 티켓을 구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심지어 하이라이트인 남자부 결승 경기조차도 호주 선수 혹은 호주 사람들이 좋아하는 로저 페더러가 진출하지 않는 한 전날까지도 티켓이 남아있기도 한다. 다만 관전하기에 좋은 좌석은 기업용 좌석이나 투어 패키지용으로 할당되고, 개인에게는 많이 풀리지 않아서 제대로 경기를 보려면 일찍 구입해야 한다.

내가 구입한 표는 여자부 준결승 두 경기가 예정된 1월 24일 로드 레이버 아레나의 데이 세션 티켓이었다. 1라운드부터 단계별로 가격이 상승하는데 토너먼트의 특성상 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만 가능하지 확실하지 않아서 마음 먹고 티켓을 사기 어렵다. 경기의 일정은 전날 오후에야 발표가 되므로 어떤 선수끼리 대결하는지는 알 수 있어도 어느 시간대에 어느 경기장에서 맞붙게 될 지는 장담할 수 없다. 로저 페더러 정도 되면 대개 저녁 시간대에 메인 경기장인 로드 레이버 아레나의 경기로 편성되지만, 해당 시간대의 티켓 판매율이 좋으면 일부러 낮 시간대로 옮겨서 티켓 판매율을 높이기도 한다.

표를 산 날이 경기 6일 전인 1월 18일이었으니 6일 후에 벌어질 경기에서 어떤 선수를 보게 될 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여자부 경기이니 예쁜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대회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계속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마리아 샤라포바, 아나 이바노비치와 다니엘라 한투코바까지 4강에 진출하여 땡잡은 기분이었다.

일정은 경기 전날인 23일 저녁에 멜번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 29일 아침 첫 비행기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학생인만큼 수업을 빠지고 가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주말과 대체 휴일이 된 월요일 덕분에 3일의 연휴가 생겨 목요일과 금요일 수업만 빠지기로 했고, 돌아오는 29일은 화요일이지만 빨리 움직이면 점심 시간 이전에 수업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24일 아침에 일찍 가서 28일 늦게 돌아오는 것이 좋겠지만 비행기표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밤 늦게 도착해서 몇 시간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에 숙소에서는 4일만 잠을 자고 출발하는 날 밤과 돌아오기 전날 밤은 공항에서 보내기로 했다.


브리즈번 시내에서 공항까지 가려면 에어트레인이라 불리는 공항철도를 타는 것이 가장 싸고 안전한 방법이다. 여행자들이 머무는 숙소에 공항 셔틀(흔히 코치라고 부른다)이 다니기는 하지만 시간대를 정해서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저녁 퇴근 시간대에 걸려 차가 막히게 되면 비행기를 놓칠 위험이 있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자들이 많은 짐을 끌고 공항으로 갈 때는 문 앞까지 와서 싣고 가는 코치가 더 편하기에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 시내의 신문 판매소라든가 일부 호스텔 카운터 등에서 에어트레인 할인 티켓을 팔았다. 역에서 표를 살 때는 14달러를 내야 했는데 이 티켓은 13달러에 살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아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발품을 팔아 미리 사서 탈 필요가 있다. 다행히 묵던 호스텔 바로 옆에 있는 곳에서 이 티켓을 팔고 있어서 가는 길에 사서 갔다.


20분만에 공항까지 갈 수 있단다..


학교를 다녀와서 바로 짐을 챙겨 나오다보니 센트럴역에서 열차를 탈 때 시간이 빠듯한 편이었는데 열차가 중간에 몇 분 정도 신호에 걸려 정차하느라 늦을까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체크인을 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는데 다행히 탑승 수속 중이었다. 따로 맡긴 짐이 없었는데, 검은 천으로 싸인 삼각대를 보더니 그게 뭐냐고 물어본다. 일본어로는 생각이 나는데 영어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음. 트.. 트라이.. (뒤의 단어가 아 젠장...)" 라고 중얼거리자, "아, 트라이포드!" 패닉에 빠질 뻔한 순간 직원 아가씨가 구해준다. 고맙다. 그렇게 무사히 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한다. 그런데 검색대에서 조금 이상하다 싶은 것이 있으면 당사자의 동의 하에 짐을 뒤지는 경우가 있는데, 여행자 치고는 짐이 너무 초라한 덕분에 즉시 수색을 당했다. "이봐, 나쁜 사람 아니라고.." 이상한 물건이 나올 리는 없고 가볍게 끝이 났다.

브리즈번 공항 국내선은 콴타스와 버진 블루, 그리고 콴타스의 저가 브랜드인 젯스타 등이 취항하고 있다. 대형 항공사가 취항하지 않는 소도시를 전문적으로 취항하는 리저널 익스프레스 같은 곳도 있지만 비중이 적고, 이용자가 한정되어 있어서 별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아무래도 업무차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은 콴타스를 많이 타고, 그 다음으로 버진 블루, 젯스타를 이용하는 편이다. 버진 블루는 젯스타에 비해서 취항 편수가 많아서 이용 승객도 많은데, 콴타스는 저가 브랜드인 젯스타의 취항을 늘릴수록 고가 브랜드 콴타스의 승객마저도 젯스타를 이용하여 전체적인 수입이 줄어드는 자기 잠식의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멜번에는 공항이 두 개 있는데 멜번 공항이라고 부르는 툴라마린에 위치한 공항이 하나 있고, 시내에서 더 멀리 떨어진 질롱에 위치한 아발론 공항이 있다. 툴라마린의 멜번 공항은 국제공항과 함께 있어서 규모가 큰데, 도심까지는 약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브리즈번에서 멜번을 연결하는 노선 중 콴타스와 버진 블루는 툴라마린 공항에서 이착륙을 하는 반면, 젯스타는 공항세 절감을 위해 아발론 공항으로만 취항을 했다(나중에 젯스타도 브리즈번에서 툴라마린으로 가는 노선이 생긴다). 멜번이 초행길이기도 했지만 숙소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항이 툴라마린 공항이어서 여기로 가는 가장 싼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렇지만 한창 관광객들이 몰리는 시기인지라 세금 포함 164달러의 거금을 지불하여야 했다. 이 돈이면 일주일 동안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데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저질렀다.

 


호주 국내선 비행기표는 공항마다 항공사와 공항마다 조금씩 다른데 이렇게 우리나라 국내선과 마찬가지로 영수증을 인쇄할 때 쓰는 감열지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뽑아주기도 하고 국제선처럼 항공사 로고가 그려진 티켓 용지에 인쇄를 해주기도 한다. 비행 시간은 2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멜번은 일광 절약 시간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브리즈번보다 1시간이 빨랐다. 20시에 출발해서 23시 50분 도착 예정이니 9시간만 어떻게 공항에서 버티면 되었다. 공항에서 혼자 무엇을 하고 놀고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출발이 지연된단다. 만세!


호주의 국내선 비행기는 약 80% 정도의 정시 출발률을 기록하는데 콴타스와 버진 블루[각주:1]가 상위권에 있는 편이다. 이 두 항공사의 브리즈번에서 시드니, 멜번을 오가는 비행기는 항공사마다 거의 매 시간마다 있고, 호주의 양대 도시인 시드니와 멜번을 오가는 비행기는 거의 30분에 한 대 꼴로 비행기가 있다. 대개 대도시들을 오가는 비행기들은 하루에 양 도시를 여러 번 왕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착과 출발의 간격이 타이트해서 한 번 조금이라도 늦게 출발하게 되면 연쇄적으로 조금씩 늦어지면서 지연이 종종 발생한다.

그런데 호주 사람들은 지연이 발생하더라도 흥분하고 화내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간혹 극성맞은 사람들이 있어서 항의를 하기는 하지만, 정말 급한 사정이 아니면 대개 자신들의 할 일을 하면서 참고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질 급한 한국인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느긋한 삶을 사는 호주 사람들에게는 잠시 늦어지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여유가 있다. 화를 내고 항의를 해봤자 늦어진 비행기가 빨리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체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침착하게 비행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국제선보다 국내선 수요가 더 많다보니 국내선 터미널에도 서점과 카페, 그리고 음식점 등이 자리하고 있어서 시간을 보내기 어렵지는 않다. 어린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은 간단한 음식을 먹으러 다녀오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고 수트 차림의 중년 아저씨는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다. 커피 한 잔에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여유가 없는지라 미리 사 온 과자 한 봉지를 꺼내 먹으면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안내 방송이 들렸다. 나이 먹고 억지로 배우는 영어인지라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서 신경을 써야 한다. 곧 비행기가 도착하면 탑승을 시작할 것이니 미리 준비하고 있으란다. 조금 더 늦어도 되는데..

앞으로 <멜번 다이어리>에서는 호주오픈 관람과 필립 아일랜드,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 다녀온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다. 성능이 좋지 않은 카메라에 실력이 나쁜 사용자 덕분에 사진이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지만 혹시 멜번에 관심 있고 여행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Melbourne의 공식적인 한글 표기는 멜버른이지만 실제 호주에서는 그렇게 발음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멜번이라고 씁니다.

  1. 버진 블루는 현재 버진 오스트레일리아(Virgin Australia)로 바뀌었음 [본문으로]

노박 조코비치(24·세르비아, 세계 2위)가 제 125회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에서 디펜딩 챔피언이자 몇 시간 후 자신에게 세계랭킹 1위를 내어줄 라파엘 나달(25·스페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생애 첫 윔블던 우승을 차지했다. 호주오픈 두 차례 우승을 합쳐 통산 세 번째이자 올 시즌 두 번째 그랜드 슬램 우승이다.

조코비치의 작년까지의 행보를 보면 페더러-나달 시대의 또다른 희생양이 아닌가 싶었다. 2008년 호주오픈 준결승에서 로저 페더러를 꺾고 결승에 올라 첫 그랜드 슬램 우승을 차지하였지만 작년까지 두 선수에게 밀려 3인자에 머물렀고 페더러와 나달 둘 중 하나가 부진에 빠질 때에만 가끔 2위에 이름을 올려 놓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조코비치가 아닌 페더러가 17번째 그랜드 슬램을 차지할 수 있을지 혹은 나달이 페더러의 기록을 넘어설 것인지에 더 관심을 가지며 올해 초까지도 3위에 머무르던 조코비치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테니스 선수의 전성기가 평균적으로 20대 중반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제 정점에 거의 다다른 것일지도 모를 조코비치도 앤디 로딕이나 레이튼 휴잇처럼 그저 한 번 그랜드 슬램을 차지했던 우수한 선수의 하나로 사라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올해 초부터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모두 폭발시키며 41연승의 돌풍을 일으켰다. 호주오픈에서 다시 페더러를 잡고 결승에 올라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출전하는 투어마다 페더러와 나달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프랑스오픈 4강에서 페더러에게 일격을 당하며 연승 행진이 중단되었지만, 이미 페더러를 2위 자리에서 끌어내린 후 멀찌감치 따돌렸고 1위 나달을 근소한 포인트 차이로 쫓았다. 그리고 윔블던 결승에 오르며 나달이 지켜오던 월드 넘버 원 등극이 예정된 상태에서 윔블던 타이틀을 놓고 현재가 아닌 전 1위가 되는 나달을 상대로 승리했다. 단 한 번의 패배가 아쉬울 정도로 시즌 48승 1패의 경이적인 승률을 자랑하며 극강의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 조코비치는 이제 페더러-나달의 시대의 막을 내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선수가 될지도 모른다.

드디어 윔블던 트로피에 입을 맞춘 조코비치 ⓒ AELTC / M. Hangst

 

대회 마지막 날 (7월 3일)

남자 결승 노박 조코비치 vs 라파엘 나달 (14:00 센터 코트)

경기 시작에 앞서 서로를 격려하는 두 선수 ⓒ AELTC / M. Hangst

나달은 그랜드 슬램 결승에서 로저 페더러 이외의 선수에게 져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두 선수의 상대전적은 나달이 16승 11패로 앞서 있었고, 윔블던 결승도 다섯 번째였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올해 나달을 만나 한 번도 지지 않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8강에서 발에 통증을 느꼈던 나달의 컨디션이 최고조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점도 조코비치에게는 유리한 부분이었다.(부상도 실력이다)

포어핸드 스트로크를 치기 전 공에서 시선을 집중하는 조코비치 ⓒ AELTC / T. Hindley


조코비치의 서브로 시작한 1세트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조코비치는 서브 에이스로 기분 좋은 출발을 했지만, 나달에게 연속으로 포어핸드를 맞으며 15-30으로 끌려갔다. 조코비치는 서브 에이스를 다시 터뜨리며 동점을 만들었고, 나달이 네트에 공을 꽂고 라인 밖으로 날린 덕분에 첫 게임을 승리로 장식했다. 톱랭커 간의 승부에서 자신의 서브 게임을 지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나달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서브 게임을 가볍게 챙기며 균형을 맞췄다. 이후 여섯 게임을 두 선수는 상대방에게 두 포인트 이상을 허용하지 않은 채 안전하게 자신의 서브 게임을 챙기며 4-4의 팽팽한 접전을 이어갔다. 조코비치가 아홉 번째 게임에서 이기며 5-4로 앞서 나갔고 나달의 서브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달은 연속으로 서브 에이스 두 개를 조코비치의 코트에 꽂으며 30-0의 리드를 잡았다. 5-5가 되고 첫 세트는 타이 브레이크로 이어질 분위기였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나달의 우측을 공략한 백핸드와 선상에 떨어지는 포어핸드로 동점을 만들었고, 나달은 포어핸드가 네트에 걸리며 세트 포인트를 허용하였다. 흔들린 나달은 포어핸드가 사이드라인을 벗어나면서 첫 세트를 내주고 말았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 나달 ⓒ AELTC / M. Hangst

2세트는 조코비치의 페이스로 진행되었다. 조코비치의 서브로 시작된 첫 게임에서 나달은 0-30으로 앞서며 분위기 전환을 꾀했다. 앤디 머리에게 첫 세트를 내준 후 연속으로 세 세트를 따내며 역전승을 거둔 준결승을 연상시키는 플레이였다. 그러나 나달은 왼쪽 사이드라인을 벗어나는 샷으로 동점을 허용하더니 스매시가 베이스라인을 벗어나면서 역전을 허용했다. 위기를 넘긴 조코비치는 서브 에이스를 날리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첫 게임을 가져갔고, 곧바로 나달의 서브 게임을 탈취하며 연속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15-15에서 조코비치는 나달의 서브를 노려 오른쪽 코너로 리턴하여 득점에 성공했고, 긴 랠리 끝에 나달이 백핸드를 네트에 꽂으며 브레이크 포인트가 되었다. 조코비치는 치열한 랠리가 발리로 이어지는 순간 나달의 키를 넘겨 빈 코트로 떨어지는 백핸드 샷을 날리며 승리했다. 다음 게임에서도 조코비치는 서브 에이스 두 개를 포함하여 쉽게 이기며 3-0으로 달아나 나달의 추격권에서 벗어났다. 나달은 뒤늦게 한 게임을 따내며 추격에 나섰지만, 조코비치는 4-1에서 다시 나달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여 추격의 여지를 없애며 6-1로 세트를 마무리했다.

함성을 지르며 스스로를 격려하는 조코비치 ⓒ AELTC / M. Hangst


조코비치는 4라운드부터 준결승까지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며 어렵지 않게 승리를 챙겼지만 꼭 마치 다른 사람처럼 리듬을 잃고 한 세트 씩 내주었는데 결승에서도 3세트에서 갑자기 샷의 난조를 보이며 나달에게 추격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나달은 자신의 서브로 시작한 첫 게임을 이기며 반격을 위한 시동을 걸었고, 바로 조코비치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기세를 올렸다. 두 번째 게임은 나달의 포어핸드 위너에 이은 조코비치의 어림없이 빗나가는 뜬 공으로 0-30이 되었고, 나달의 리턴 실패와 조코비치의 서브 에이스로 30-30이 되는 접전이었다. 그러나 조코비치의 포어핸드가 빗나가며 나달은 첫 브레이크 포인트에 도달했고, 조코비치가 백핸드를 네트에 날리며 나달은 첫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상승세를 탄 나달은 러브 게임으로 세 번째 게임까지 승리하여 3-0으로 앞서며 조코비치가 주도해오던 경기 흐름을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조코비치는 나달의 키를 넘기는 로빙 샷으로 한 게임을 따냈지만, 나달이 나머지 세 게임을 쓸어 담으며 3세트를 6-1로 이겼다.

조코비치 날다 ⓒ AELTC / M. Hangst


운명의 4세트는 조코비치의 서브 게임으로 시작하였다. 나달은 첫 게임에서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돌릴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잡았다. 30-30에서 조코비치가 나달의 포어핸드를 넘기지 못하고 네트에 꽂으며 나달은 브레이크 포인트가 되었다. 그러나 나달은 조코비치의 공격을 받아 친 포어핸드가 벗어나며 듀스를 허용하였고 연속으로 조코비치에게 두 포인트를 내주며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위기에서 벗어난 조코비치는 나달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2-0으로 앞서갔다. 나달은 실책을 연발하며 조코비치에게 쉬운 브레이크를 허용하며 승부가 기우는 듯했지만 아직 조코비치가 승리를 속단하기는 일렀다. 30-40으로 조코비치가 브레이크 포인트에 몰린 상황에서 넣은 서브를 나달이 포어핸드 슬라이스로 받아쳤고, 이 공은 네트 윗 부분을 맞고 조코비치의 코트로 떨어졌다. 나달은 의례적인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운이 따르는 브레이크였고, 여기에 약간 흔들린 조코비치가 이어진 게임에서 실책을 연발하며 2-2 동점이 되었다.

이겼다! ⓒ AELTC / T. Hindley


나달이 경기를 뒤집기 위해서는 조코비치가 잘 나가던 분위기가 깨진 이 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다시 냉정을 되찾아 나달을 무섭게 몰아붙였고 30-30에서 나달의 백핸드가 네트에 걸리고 포어핸드 리턴이 베이스라인을 넘어가면서 3-2로 앞서기 시작했다. 조코비치가 강해진 가장 큰 이유는 경기 중에 페이스가 잠시 흔들리더라도 금방 다시 마음을 다잡고 경기에 임하는 정신적인 안정인지도 모른다. 나달과 조코비치는 서로 서브 게임을 지키며 4-3이 되었고, 조코비치가 승부에 결정타를 날리는 브레이크를 하는 여덟 번째 게임에 돌입하였다. 나달은 이 경기에서 유일한 더블 폴트를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저지르며 출발이 좋지 않았는데 나달의 톱스핀 포어핸드가 벗어나고 네트에 걸리며 순식간에 쓰리 브레이크 포인트에 몰렸다. 나달은 포어핸드로 한 포인트를 만회하지만, 백핸드가 다시 길게 벗어나면서 결정적인 브레이크를 당했다. 이제 두 선수는 5-3 조코비치의 리드 속에 결승전 마지막이 된 게임에 돌입했다. 30-30으로 맞서며 아직 나달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재치있는 발리로 챔피언쉽 포인트에 도달했고, 나달의 백핸드를 겨냥한 조코비치의 깊은 크로스 백핸드 스트로크를 나달이 라인 밖으로 쳐내면서 조코비치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하늘이시여! ⓒ AELTC / M. Hangst

 

경기 요약 (출처: 윔블던 공식 사이트)

나달은 첫 서브 성공률이 좋았지만 그것이 득점과 연결되는 확률이 조코비치에 비해 낮았다. 팽팽한 접전에서 랠리를 리드한 것은 조코비치였고 그런 점들이 그대로 기록에 나타나 있다.

챔피언 그리고 준우승이 어색한 나달 ⓒ AELTC / M. Hangst


이미 1위를 예약한 조코비치였지만 윔블던 우승으로 2위 라파엘 나달과의 격차를 더 벌릴 수 있게 되었다. 조코비치는 7월 4일자 ATP 랭킹에서 13,285점으로 11,270점의 나달과 2,000점 이상으로 차이를 벌렸고, 나달은 그대로 9,230점을 유지한 3위 페더러와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조코비치는 올 시즌 나달과의 상대에서 연승 행진을 이어가면서 마지막 그랜드 슬램인 US 오픈에서 나달에게 작년의 결승전 패배를 설욕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잔디 먹는 조코비치 ⓒ AELTC / S. Wake


조코비치는 "생애 최고의 날" 이라면서 우승의 기쁨을 표현했고, 센터 코트의 잔디를 뜯어 맛을 보는 독특한 세리머니를 하여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첫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후 타이틀 방어와 사람들의 기대, 성적에 대한 부담 속에 많은 압박을 받았고, 최소한 4강 이상을 진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나달과 페더러가 지배하는 가운데 자신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스스로도 의심하고 고민했음을 솔직히 말했다. 나달은 핑계를 대지 않고 조코비치가 대단하고 환상적인 경기를 했는데 자신이 그 이상 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 패배를 인정했다. 또 현재 최고이자 내일이면 세계 최고의 선수와 경기를 했고, 자신은 두 번째라며 조코비치를 칭찬함과 동시에 세계 1위를 내준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 윔블던에서 우승하던 때를 기억하기 때문에 조코비치가 지금 얼마나 기쁠지 잘 알고 있다며 그의 우승을 축하하였다. 한편 이 날 경기가 열린 센터 코트에는 세르비아의 대통령 보리스 타딕이 로얄석에서 앉아 직접 조코비치를 응원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윔블던 여자 단식 결승에서 경기장의 소음 차단녀 페트라 크비토바(21·체코, 세계 8위)가 7년만의 화려한 컴백을 눈앞에 두었던 요정 마리아 샤라포바(24·러시아, 세계 6위)를 물리치고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준결승에서 괴성녀 빅토리아 아자렌카를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온 크비토바는 다시 악쓰는 여자 샤라포바를 누르며 시끄러운 선수들의 킬러로 자리매김했다. 대회 전에는 아무도 그녀를 우승 후보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소리 없이 강했던 그녀는 강호들을 하나씩 무찌르며 지난 10년간 윌리엄스 자매 외 단 두 명에게만 허락되었던 윔블던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윔블던 여왕 페트라 크비토바 ⓒ AELTC / M. Hangst

 

윔블던 파이널리스트 ⓒ AELTC / J. Buckle

 

대회 12일째 (7월 2일)

여자 결승 페트라 크비토바 vs 마리아 샤라포바 (14:00 센터 코트)

결승전에 입장하는 크비토바와 샤라포바 ⓒ AELTC / M. Hangst

샤라포바의 우세를 점친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샤라포바는 4강까지 여섯 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는 깔끔한 경기를 했고, 베이스라인에서 날리는 강력한 스트로크가 전성기에 못지않게 살아났다는 평이었다. 그러나 경기에 앞서 체코 출신의 '철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는 샤라포바가 왼손잡이인 크비토바의 서브의 궤적이 낯설어 받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공을 쫓는 샤라포바 ⓒ AELTC / M. Hangst

크비토바는 시작부터 첫 서브가 잘 들어가지 않았는데 두 번의 포어핸드 미스로 샤라포바에게 0-30으로 끌려갔다. 샤라포바의 실책과 좋지 않은 서브 리턴을 빈 곳을 찾아 공격하여 동점을 만들었지만, 연달아 네트에 공을 꽂으며 첫 게임을 내주었다. 그러나 샤라포바의 서브 게임을 바로 브레이크하면서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샤라포바는 15-40에서 더블 폴트를 저질러 게임을 내준 것이 뼈아팠다. 이어진 크비토바의 서브 게임에서는 두 번의 듀스 끝에 샤라포바의 리턴 실패와 크비토바의 백핸드 위너가 이어지며 크비토바가 승리하며 경기를 역전시켰다. 샤라포바 역시 더블 폴트를 또 저질렀지만 긴 랠리에서 승리하며 서브 게임을 지켜 2-2를 만들었다. 그러나 크비토바가 이어진 서브 게임을 지킨 반면 샤라포바는 30-30에서 더블 폴트를 두 번 연달아 저지르며 게임을 내주어 4-2가 되면서 균형이 깨졌다. 크비토바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서브 게임을 지키며 5-2로 달아났고, 이후 한 게임씩 주고받으며 6-3으로 1세트는 크비토바의 승리로 끝났다.

크비토바는 왼손잡이입니다 ⓒ AELTC / T. Hindley

2세트에서 크비토바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샤라포바를 압박했다. 샤라포바는 0-30으로 앞섰지만, 리턴 미스와 크비토바의 크로스 포어핸드에 동점을 허용했다. 이어서 샤라포바의 다섯 번째 더블 폴트가 나오며 졸지에 브레이크 포인트에 밀렸고 크비토바는 베이스라인 위에 떨어지는 포어핸드로 첫 게임을 가져갔다. 라인 심판은 처음에 아웃을 선언했지만 바로 정정했고, 샤라포바는 챌린지를 했지만 인으로 판명되면서 기회만 날렸다. 다음 게임에서 크비토바는 40-30에서 더블 폴트로 듀스를 허용했지만 강력한 서브 두 개로 승리를 챙겼다. 다시 두 게임 차이로 밀리면서 샤라포바는 위기를 맞이했지만 깔끔하게 서브 게임을 지킨 후 크비토바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면서 2-2를 만들었다. 크비토바는 세 번째 더블 폴트를 하면서 샤라포바에 기회를 주었고, 샤라포바는 베이스라인 스트로크가 살아나면서 30-40의 브레이크 포인트에 도달했다. 크비토바는 듀스로 갈 기회가 있었지만 다소 약했던 스매시가 샤라포바의 본능적인 방어에 걸리며 크비토바의 키를 넘겨 베이스라인 안쪽에 떨어지면서 게임을 내주었다. 크비토바에게는 불운이었지만, 샤라포바와 샤라포바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윔블던 여왕에 오르는 결승점이 된 강력한 크비토바의 서브 ⓒ AELTC / M. Hangst

샤라포바는 반격의 기회를 맞은 듯했지만 서브 게임을 내주며 좋은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샤라포바는 30-40의 게임 포인트에 도달했지만 크비토바의 강력한 스트로크가 폭발하며 네 번의 듀스 끝에 크비토바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그러나 롤러코스터 경기는 샤라포바만의 것이 아니었다. 크비토바는 듀스에서 시터를 네트에 꽂고 샤라포바의 강한 리턴을 맞으며 다시 서브 게임을 내주는 브레이크 랠리가 이어졌다. 다시 3-3 동점. 계속 브레이크 랠리가 이어지면 먼저 서브를 넣는 샤라포바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세트의 절반을 지나는 순간, 크비토바가 승리를 향한 부스터를 발동시켰다. 크비토바는 샤라포바의 서브를 강하게 리턴하면서 투 브레이크 포인트를 만들었고, 한 점을 따라잡혔지만 샤라포바의 포어핸드가 길게 벗어나며 다시 리드를 잡았다. 이어진 서브 게임에서 15-30으로 밀렸지만 샤라포바가 받아내기 힘든 강한 서브를 연달아 코트에 꽂으며 승리하며 5-3으로 생애 첫 윔블던 우승까지 단 한 게임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샤라포바는 뒤늦게 서브 게임을 지키며 5-4로 따라붙었지만, 크비토바는 침착하게 강한 서브를 넣으며 샤라포바를 압박했고, 40-0의 쓰리 챔피언쉽 포인트에 도달했다. 자신의 첫 우승을 자축하려는 듯이 크비토바는 깔끔한 서브 에이스로 경기를 마감하면서 윔블던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경기 요약 (출처 : 윔블던 공식 사이트)

샤라포바는 76%의 첫 서브 적중률을 기록했지만 더블 폴트를 의식한 나머지 위력이 떨어졌고 코스 역시 좋지 못해 크비토바의 강력한 리턴에 고전했다. 서브 후 득점으로 연결시키는 빈도가 크게 떨어진 것이 샤라포바가 다섯 번이나 브레이크를 당한 이유였다. 크비토바는 샤라포바에 미사일 스트로크에 지지 않고 스트로크 싸움을 펼쳐 승리를 거두었는데, 서브가 약해진 샤라포바의 유일한 장점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이 승리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윔블던 파이널리스트 ⓒ AELTC / T. Hindley

크비토바는 이번 승리로 윔블던 여왕에 오르면서  세계 톱랭커들도 평생 한 번 차지하기 힘든 그랜드 슬램을 차지한 것은 선수 생활을 하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큰 대회에 참가할 때도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 있어 앞으로의 선전이 더 기대된다. 그녀는 세계랭킹 8위에 작년 준결승 진출자임에도 우승 후보로는 꼽히지 않았다. 처음 결승에 오른 그랜드 슬램에서 전혀 긴장하지 않고 경기를 승리로 이끌 만큼의 강심장은 앞으로 대회마다 그녀를 우승 후보로 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왼손잡이라는 희소성에 어느 선수에도 뒤지지 않는 파워풀한 서브와 스트로크는 수비형 선수들이 많아진 최근의 여자 테니스계에서 주목을 받을 것이다.

승자의 스포트라이트 ⓒ AELTC / T. Hindley

준우승에 머무른 샤라포바 역시 크비토바에 대해 대단한 경기를 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날 경기에 대해 크비토바가 코트 전체에서 강력한 위닝샷을 쳤고 자신보다 더 공격적으로 깊고 강한 공을 쳤다고 하였다. 크비토바의 장점으로 강력한 게임 운영과 힘을 꼽으며, 터프 포지션에서 공격적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샤라포바는 아쉬움 속에서도 긴 부상 끝에 윔블던 결승까지 오른 것은 앞으로 남은 투어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경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면서 부상을 떨쳐내고 정상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에 만족을 표시했다. 샤라포바의 약혼자인 샤샤 부야치치는 대회 내내 관중석에서 샤라포바를 열렬히 응원하였는데 패배로 참 아쉽게 되었다.

준우승자이지만 여전한 인기를 과시하는 샤라포바 ⓒ AELTC / M. Hangst

그동안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윔블던은 오늘 남자 단식 결승을 끝으로 2주간의 대회를 마치게 된다. 조코비치와 나달이라는 신 라이벌 대결에서 누가 웃을지도 관심이지만 대회가 끝난다니 아쉬운 마음도 든다.

보너스 샷 샤라포바 언니 ⓒ AELTC / J. Buckle

1936년 브래드 페리의 우승 이후 영국인들은 그 후로 자국 선수들이 윔블던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1938년 버니 오스틴의 결승전 패배 이후 70년이 넘도록 영국 선수들은 윔블던 결승조차 진출하지 못했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영국의 에이스였던 팀 헨만도 네 번이나 준결승에서 좌절을 맛보아야 했고 헨만의 은퇴 후 그들의 염원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앤디 머리(24·영국, 세계 4위, a.k.a 앤디 머레이)를 향해 있었다. 그런 홈팬들의 열렬한 성원을 입고 경기에 나섰지만 머리는 2년 연속 라파엘 나달(25·스페인, 세계 1위)에게 4강에서 패하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윔블던 2연패, 통산 3번째 우승에 도전하는 라파엘 나달 ⓒ AELTC / T. Hindley


대회 11일째 (7월 1일)

남자 4강 제 2경기 라파엘 나달 vs 앤디 머리 (센터 코트)

디펜딩 챔피언 라파엘 나달의 입장 ⓒ AELTC / N. Tingle

영국의 희망 앤디 머리의 입장 ⓒ AELTC / N. Tingle

영국 홈팬들의 염원을 안고 경기에 나선 머리는 1세트에서 정말 그 꿈을 이룰 것만 같은 경기를 하였다. 반면에 나달은 마치 예열이 덜 된 듯하였다. 머리는 서브 에이스 두 개를 앞세워 첫 게임을 기분 좋게 시작하며 앞서 나갔다. 나달은 아직 평소같이 날카롭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특유의 톱 스핀 스트로크를 앞세워 머리를 베이스라인에 묶어 둔 채 경기를 하며 팽팽한 승부를 이어갔다. 나달은 심판이 친 크로스 샷을 아웃으로 판정하였는데 이에 대한 챌린지를 하지 않았다. 이어진 플레이에서 나달이 득점을 했는데, 챌린지를 했더라면 머리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할 수 있었는데 이 게임은 머리의 승리로 끝이 났다. 머리는 힙에 이상을 느껴 트레이너를 불렀는데, 별 이상이 없는지 다시 경기에 임했다. 두 선수는 5-6까지 서브 게임을 잘 지키며 팽팽한 승부를 이어갔는데, 나달의 서브 게임을 머리가 처음이자 마지막 브레이크를 하며 5-7로 세트를 따냈다. 이번 만큼은 머리가 나달을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기대하였던 영국인들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나달의 강력한 포어핸드 스트로크 ⓒ AELTC / N. Tingle

그러나 2세트부터 영국인들에게 악몽같은 일들이 펼쳐졌다. 머리는 1-2로 앞선 상황에서 나달의 서브 게임을 다시 챙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15-30의 리드가 15-40으로 변해야 할 순간 머리가 친 포어핸드 시터가 사이드라인을 벗어나며 30-30이 되면서 나달이 쉽게 게임을 마무리지었다. 위기 뒤에 바로 기회가 오는 법이라고 다음 게임에서 바로 나달이 경기에서 첫 번째 브레이크에 성공하며 리드를 잡았다. 스코어는 팽팽해도 랠리를 주도하는 것은 머리였는데 30-30에서 더블 폴트를 기록하면서 나달에게 브레이크 포인트를 주었고, 나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게임을 따냈다. 이어진 게임에서는 감을 잡기 시작한 나달의 스트로크가 머리의 좌우를 흔들며 괴롭히며 4-2로 리드하였다. 머리의 부진 역시 갑작스러운 반전에 한 몫을 하였다. 머리는 첫 서브가 잘 들어가지 않으며 고전하기 시작했고, 스트로크는 구석으로 향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 브레이크를 당하고 말았다. 나달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선수였다. 기세를 몰아 마지막 게임을 따내며 36분 만에 2세트를 끝냈다.

나달의 백핸드 ⓒ AELTC / T. Hindley

3세트에서 머리는 완전히 경기 리듬을 잃어버렸다. 여전히 첫 서브가 말을 듣지 않으며 고전했고, 포어핸드 스트로크는 전혀 들어가지 않으며 첫 서브 게임을 내주고 말았다. 반대로 나달은 완전히 자신의 리듬을 찾아 경기를 유리하게 전개하였다. 서브 에이스 세 개를 기록하며 4-2로 달아났고, 다시 머리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면서 3세트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나달이 이어진 서브 게임을 지키며 다시 6-2로 세트를 따냈다.

이기고 있는 나달은 미끄러지면서도 여유가 있다 ⓒ AELTC / N. Tingle

4세트는 마지막에 몰린 머리의 분발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나달은 첫 게임부터 브레이크하면서 일말의 희망을 갖던 영국인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머리의 서브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고, 힘없는 두 번째 서브는 나달에게 밥을 갖다 주는 셈이었다. 머리는 첫 포인트를 내준 후 오래간만에 터진 서브 에이스로 만회하는 듯하였지만 연속으로 스매시와 포어핸드를 네트에 꽂으며 브레이크 포인트를 헌납하였고, 나달은 머리의 성의에 브레이크로 보답하였다. 이 브레이크 하나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머리는 6-4로 패하게 된다. 나달의 3:1(5-7 6-2 6-2 6-4) 승리.

경기 요약 (출처 : 윔블던 공식 사이트)

기록을 보면 머리의 첫 서브 성공률은 58%인데, 1세트에서는 66%였던 서브 성공률이 2,3세트를 거치며 50% 이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4세트 중반 이후의 선전으로 간신히 조금 올랐다. 머리는 나달보다 강한 서브를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며 나달에게 많은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머리의 실책이 39개로 단 7개만을 기록한 나달보다 다섯 배 이상 많았던 것도 경기를 결코 유리하게 가져갈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경기 리뷰를 하면서 쓰기는 했지만 2세트부터는 나달의 일방적인 페이스로 경기가 진행되어 박진감을 느낄 수 없는 지루한 경기가 되었다.

풀죽은 머리의 인터뷰 모습 ⓒ AELTC / N. Tingle

나달은 승리와 함께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음에도 월요일에 발표되는 ATP 랭킹에서 노박 조코비치에게 1위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세계 1위는 나달이 로저 페더러의 4년 6개월 간의 장기 집권을 무너뜨린 후 다시 한 번씩 주고 받으며 7년 가까이 두 사람만이 차지하던 자리였으나, 조코비치가 그 성역을 깨뜨렸다. 나달이 우승으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지 조코비치가 새로운 월드 넘버 원이 된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 두 선수의 팽팽한 접전이 예상된다.

노박 조코비치(24·세르비아, 세계 2위)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세계랭킹 1위에 오르게 되었다. 조코비치는 윔블던 4강에서 조-윌프레드 송가(26·프랑스, 세계 19위)를 누르고 결승에 진출하면서 결승 결과에 상관없이 2004년 2월부터 페더러와 나달이 번갈아가면서 독점해오던 세계랭킹 1위를 빼앗은 첫 번째 선수가 되었다.

조코비치, 내가 월드 넘버 원이다 ⓒ AELTC / N. Tingle


대회 11일째 (7월 1일)

남자 4강 제 1경기 노박 조코비치 vs 조-윌프레드 송가 (13:00, 센터 코트)

송가는 8강에서 페더러에게 기적같은 역전승을 일구어냈지만, 송가를 우승 후보로 꼽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나달이나 조코비치의 우승 확률이 높아졌다는 반응이 대세였다. 송가가 페더러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1세트 이후 단 한 번도 브레이크를 허용하지 않은 강력한 서브에 있었는데, 경기마다 가장 기복이 심한 것이 바로 이 서브다. 서브로 흥한 자 서브로 망하는 테니스에서 강서버들이 꾸준하게 성적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코비치의 백핸드 스트로크 ⓒ AELTC / N. Tingle

송가는 조코비치의 서브를 브레이크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송가는 40-40 듀스에서 네트로 달려가며 발리로 어드밴티지를 얻었고, 베이스라인에서 벌어진 긴 랠리 끝에 조코비치가 친 공이 벗어나며 첫 게임을 가져왔다. 그리고 서로 자신의 서브를 지키며 4-5 까지 왔다. 송가는 첫 세트를 끝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송가의 서브 앤 발리의 전술을 파악한 조코비치가 각을 찾아 반격하며 순식간에 40-0 쓰리 브레이크 포인트가 되었다. 송가는 힘겹게 듀스를 만들었지만 더블 폴트로 다시 브레이크 포인트에 몰렸고, 긴 랠리 끝에 덜미를 잡혔다. 한 게임씩 주고 받으며 두 선수는 타이 브레이크에 돌입했다. 3-2에서 송가는 두 번의 서브 중 포인트를 하나만 얻었지만, 4-3에서 조코비치는 두 포인트를 모두 따내며 6-3이 되면서 순식간에 쓰리 세트 포인트에 도달했다. 송가는 뒤늦게 두 포인트를 추격했지만 7-5로 조코비치가 승리하며 첫 세트를 가져갔다.

달려라 조코비치 ⓒ AELTC / N. Tingle

2세트는 조코비치가 완벽하게 송가를 제압했다. 첫 게임부터 송가의 서브를 브레이크하고 3-1로 앞선 다섯 번째 게임도 브레이크하면서 송가를 밀어붙였다. 페더러와의 경기와 달리 강력한 서브의 위력이 사라진 송가는 조코비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3세트 역시 2세트와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1-1에서 송가의 서브를 브레이크하면서 조코비치는 리드를 잡았고, 4-3으로 앞서갈 때만 해도 조코비치가 송가를 셧아웃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송가는 강력한 리턴과 포어핸드가 터지며 조코비치의 서브를 브레이크하였다. 서로 서브를 지키며 5-5가 된 11번째 게임에서 조코비치는 네트 앞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며 송가의 서브를 브레이크하였다. 자신의 서브만 지키면 경기를 끝낼 수 있는 조코비치의 방심이었을까 아니면 패배에 몰린 송가의 의지였을까 기적 같은 강력한 서브 리턴을 앞세워 송가는 살아나며 다시 타이 브레이크로 승부를 끌고 갔다. 관중들의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송가는 긴 타이 브레이크를 11-9로 따내며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송가 날다 ⓒ AELTC / N. Tingle

두 선수 모두 조금 지친 기색이 보이는 가운데 4세트를 시작했다. 분명 페더러의 패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조코비치는 브레이크 포함 연속 세 게임을 따내며 3-0으로 앞서 나갔다. 송가는 서브를 앞세워 한 게임을 만회한 후 조코비치의 서브 게임에서 0-30으로 앞서가며 브레이크를 노렸다. 그러나 조코비치는 견고한 수비로 송가의 실책을 유도했고, 백핸드로 게임을 챙기며 4-1로 도망가면서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후 두 게임씩 서로 챙기며 조코비치가 6-3으로 세트를 가져가며 3:1(7-6 6-2 6-7 6-3)로 승리했다.

 

수고했어 ⓒ AELTC / T. Hindley


경기 요약 (출처 : 윔블던 공식 사이트)

송가는 최고 시속 222km(138mph)의 강서브를 날리기도 했지만, 서브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상대적으로 그라운드 플레이가 뛰어난 조코비치에게 기회를 주는 셈이었다. 특히 두 번째 서브를 넣은 후 득점 성공률이 47%에 그친 것은, 조코비치가 강력한 리턴으로 득점으로 연결시키는 기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송가가 서브 에이스에서 조코비치보다 앞섰지만, 조코비치의 수비망을 뚫지 못하며 페더러와의 경기에서만큼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송가는 강력한 서브를 살릴 수 있는 스트로크, 특히 백핸드의 정확도와 파워를 향상시키지 않는 한 우승 후보를 잡는 복병은 될 수 있을지언정 우승은 할 수 없는 선수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조코비치는 이 승리로 7월 4일 월요일에 발표되는 ATP 세계 랭킹에서 나달을 제치고 1위에 오르게 되었다. 디펜딩 챔피언 나달이 조코비치를 꺾고 우승을 하더라도 포인트에 변화가 없는 반면, 나달에 65점 뒤진 조코비치는 패하더라도 작년 4강에 올라서 얻었던 720점보다 480점을 더 획득하여 나달을 앞서게 된다. 나달과 조코비치의 상대 전적은 나달이 16승 11패로 앞서고 있지만, 이번 시즌 네 번의 대결에서는 모두 조코비치가 승리하였다. 두 선수의 윔블던 상대 전적은 2007년 조코비치가 기권하면서 패한 적이 있는데, 이 경기가 두 선수가 잔디 코트에서 맞붙은 유일한 경기다. 과연 윔블던 트로피는 누구의 품에 안기게 될 지 흥미진진한 경기가 예상된다.

마리아 샤라포바(24·러시아, 세계랭킹 6위)가 돌아왔다. 7년 전 그녀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던 그 윔블던 결승의 현장으로. 샤라포바는 자비너 리지키(21·독일, 세계랭킹 62위)를 맞아 2:0(6-4 6-3)으로 승리를 거두고 통산 두 번째 윔블던 우승, 네 번째 그랜드 슬램을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7년만에 윔블던 결승에 진출한 샤라포바 ⓒ AELTC / N. Tingle

 

대회 10일째 (30일)

여자 4강 제 2경기 마리아 샤라포바 vs 자비너 리지키 (센터 코트)


Come On!! ⓒ AELTC / N. Tingle


샤라포바의 출발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4강에서 탈락했던 프랑스오픈을 연상시키는 최악의 모습이었다. 리지키의 서브로 시작한 첫 게임에서 지고, 자신의 서브 게임을 맞이했다. 그런데 샤라포바의 서브는 말을 듣지 않았다. 더블 폴트로 첫 점수를 내주고 실책과 리지키의 포어핸드 득점으로 순식간에 쓰리 브레이크 포인트에 몰리더니 다시 더블 폴트로 게임을 내주었다. 리지키가 다시 서브 게임을 지키면서 0-3으로 밀린 상황에서 샤라포바는 이 경기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게임에 돌입하였다. 다시 더블 폴트로 먼저 점수를 내주며 불안했던 샤라포바는 동점을 만들며 트레이드 마크인 "Come On" 을 터뜨렸다. 연속으로 두 포인트를 얻으며 게임 포인트에 도달했지만 다시 집중력을 잃으며 듀스를 허용했고 더블 폴트로 리지키의 어드밴티지까지 몰렸다. 리지키의 드롭샷은 벗어나 다시 듀스가 되었고, 위기를 넘긴 샤라포바는 두 포인트를 연속으로 얻으며 간신히 서브 게임을 지켰다. 1-3에서 리지키의 서브, 그러나 샤라포바는 조금씩 자신의 주무기인 포어핸드의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미사일같은 강력한 포어핸드 스트로크가 나오며 브레이크 포인트에 도달했고 리지키가 네트에 공을 치며 첫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샤라포바는 여전히 더블 폴트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베이스라인에서 상대의 좌우로 흔들어대는 강력한 스트로크가 뿜어져 나오며 3-3 동점을 만들었다. 둘 다 서브 게임을 지키며 팽팽히 맞선 4-4, 리지키는 첫 서브에서 실패하면서 약한 세컨드 서브로 샤라포바에게 반격의 기회를 스스로 제공해주며 무너졌다. 샤라포바의 두 번째 브레이크로 5-4 역전, 기세를 몰아 샤라포바는 더블 폴트가 있었지만 강력한 포어핸드로 40-15로 투 세트 포인트에 도달했다. 리지키는 드롭샷으로 포인트를 올리며 저항했지만, 샤라포바는 서브 에이스로 세트를 끝냈다.

 

샤라포바의 백핸드 미사일 스트로크 ⓒ AELTC / T. Hindley

다시 리지키의 서브로 시작한 2세트. 그러나 서브가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이 전염되었는지 리지키의 첫 서브 성공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리지키는 주무기인 시속 200km에 달하는 강력한 서브가 말을 듣지 않자 스스로도 어이없어 하면서 경기를 풀어가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샤라포바는 리지키의 세컨드 서브를 적극적으로 공략해 폭격을 가해 게임을 브레이크했다. 샤라포바는 계속 더블 폴트를 저지르면서도 미사일 쇼로 리지키를 꼼짝 못하게 하면서 2-0, 다시 리지키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3-0으로 앞섰다. 리지키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 샤라포바의 서브를 포어핸드로 리턴하여 3-1로 따라갔지만, 서브가 들어가지 않아 듀스 끝에 게임을 내주어 4-1이 되었다. 리지키는 윔블던 4강이라는 무대에 오른 것만으로도 기쁜지 뜻대로 되지 않는 경기에 어이가 없는지 리나를 상대할 때처럼 끈질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샤라포바의 서브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아 듀스와 어드밴티지를 반복하며 고전하였지만, 노련한 샤라포바는 힘들게 지키며 5-1을 만들어 승기를 굳혔다. 샤라포바는 5-2에서 서브 게임을 더블 폴트로 놓치며 5-3으로 추격을 허용하였지만, 리지키의 서브를 다시 브레이크하면서 경기를 마무리했다.

 

리지키는 경기에 밀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는데 승부욕이 부족한 것일까. ⓒ AELTC / N. Tingle

 

경기 요약 (출처 : 윔블던 공식 홈페이지)

경기 결과를 요약하면 두 선수 모두 전반적으로 경기 내용이 좋지는 않았다. 샤라포바는 첫 서브의 성공률이 절반도 미치지 못했고, 리지키 역시 53%로 아주 좋지 않았다. 샤라포바는 더블 폴트를 13번이나 저질렀지만, 리지키 역시 첫 서브를 제대로 넣지 못해 두 번째 서브에서 리턴하기 쉬운 공이 들어온 덕분에 특유의 베이스라인 플레이가 가능했다. 리지키는 첫 서브와 두 번째 서브의 위력 차이가 심했는데, 약한 두 번째 서브가 샤라포바에게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말았다. 샤라포바는 서브가 좋지 않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경기를 하면서 좋지 않은 컨디션에서도 경기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점이 고무적이다. 55%에 달하는 리시빙 포인트의 득점 연결과 더 많은 실책, 적은 위너 속에서도 집중력있게 필요한 순간에 점수를 올린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리지키는 비슷한 상황에서 샤라포바의 강력한 스트로크에 밀려 드롭샷과 같은 변칙적인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있지만, 더 많은 포인트를 올리면서도 게임은 따내지 못하는 효율적이지 못한 경기를 하며 패배하였다.

샤라포바는 과연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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