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에는 비바람이 세게 불어서 태풍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나마 삿포로는 태풍의 직접 영향권에는 들지 않아서 큰 피해는 없었는데 밤새 비바람에 열어두고 자던 창문을 닫아야만 했다. 잠자리가 바뀌었다고 느지막히 겨우 잠에 들기는 했는데, 몇 시간 못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올라와서 엎어져 있다가 회사 일이 생겨서 잠시 하고, 태풍 피해 뉴스를 보다가 씻고 밖으로 나갔다.

홋카이도, 삿포로라고 하면 눈 내리는 모습이나 눈이 쌓인 순백의 아름다운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겨울에는 눈 빼고는 볼 것이 없다. 눈이라는 것을 자기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동남아시아나 타이완,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 온 관광객들은 굉장히 신기해하지만, 강원도에서 2년 동안 눈 쓸면서 지냈던 - 심지어 눈이 많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있으면 전날에 일찍 취침을 당한 뒤 어두운 새벽시간에 강제로 끌려나가 눈을 쓰는 생활을 했던 사람은 조금도 눈이 반갑지가 않다. 그나마 삿포로는 유키마츠리라는 유명한 축제가 있어서 이 기간 중에 눈과 얼음으로 만든 작품들을 전시하여 보는 재미라도 있는데, 강원도 산골처럼 인적이 드문 동네에 가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스스로 길을 만들면서 헤치고 나가야 하는 곤란한 상황을 접할 수도 있다.

홋카이도의 최성수기라면 연말연시, 크리스마스 전후, 그리고 유키마츠리 기간, 그리고 여름철이라 할 수 있겠다. 9월을 눈 앞에 둔 이 시기는 준성수기 정도로 조금 밀려나는 정도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홋카이도를 찾고, 덥지 않고 선선한 날씨에 돌아다니기에 딱 좋다.

언제나 그렇듯이 노잣돈 여유있게 가지고 온 적이 없으니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는데, 삿포로가 일본 5대 도시면 뭐하나 버스 다니는 것을 보면 20~30분은 기다려야 하고, 배차 간격이 길어 자주 다니지 않는 곳에 가는 버스는 한두 시간에 한 대 정도 다닐까 말까 한다. 세븐일레븐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먹고, 와이파이 접속해서 이메일 확인을 한 뒤 가까운 곳에 있는 버스정류장을 찾아서 갔는데, 이 곳에서는 타려는 버스가 없는 것 같다. 미리 찾아보고 나올 것을 그랬나 싶은데, 다시 호텔로 돌아가기에는 조금 멀리 나왔고, 그냥 이렇게 된 김에 동네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무엇을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나카지마공원에 가서 산책이나 할까, 거기는 예전에 눈 쌓인 겨울에 다녀온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아마 천문대가 있었던 곳이었던 것 같다.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왠지 가고 싶지는 않는 것이 몸이 오늘은 조금만 걷자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시내 거리를 돌아다니다 어딘가 들어가서 맛있어 보이는 것을 시켜서 먹을까, 비루엔에 가서 양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맥주나 마실까 등 여러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일단 가까운 곳에 있는 음식점을 찾아본다. 라멘 가게가 몇 군데 보이는데, 라멘을 즐기지는 않아서 패스하고 큰 길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살펴보는데 별로 갈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길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까우니 겨울에도 보거나 할 수 있는 것 말고 여름에만 보고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싶어 생각을 해보니 히츠지가오카 전망대에 가서 양을 보고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년 전에 삿포로에 왔을 때 이 전망대에 다녀온 적이 있지만, 한겨울에 가서 양은 코빼기도 못 본 채, 쌓인 눈만 보고 입장료를 삥뜯겼던 슬프고 화나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좋았던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려도, 뇌리 속에 각인된 슬픈 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는 법이니..

한 시간 남짓 동네 한 바퀴를 돌아다니고 나서야 편의점 로손에 들러서 빵과 음료수를 사서 먹고, 그제서야 무엇을 할 지 결정을 하고 묵고 있는 호텔에서 멀지 않은 지하철역으로 되돌아갔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할 때 사용하는 승차권이 있다고 해서 자동판매기에서 샀다.


9년 전인 2007년 2월에 이 곳에 왔을 때는 지하철 요금과 버스 요금을 따로 냈던 것 같은데, 버스 환승 승차권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지하철 나중에 환승할인제도가 새로 생긴 것인지, 아니면 당시에도 있었는데 몰라서 이용하지 못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전자일 것 같은데, 시내 구간에서 지하철 한 번 타고 버스로 4km 정도 간다고 380엔의 돈을 받아가다니 이 나라의 교통비는 참 비싸다. 교통비가 비싸다는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통근, 통학용 정기권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1회 이용할 때에 비해 상당히 큰 폭의 할인 혜택이 주어지고, 직장인의 경우에는 대개 회사에서 통근비용을 지급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돈이 따로 들지 않으니 주말이나 휴일에 개인적으로 이용할 때나 부담스럽게 느껴질 것 같다.


후쿠즈미(福住)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지하철과 버스로 다녀온 적이 있는데 지하철은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버스는 자주 다니지 않아서 시간을 잘 맞춰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삿포로가 큰 도시이기는 하지만, 홋카이도 전체 인구가 500만도 되지 않는 곳이니 서울이나 부산 같은 도시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냉정히 대중교통만 놓고 보면 서울 외곽의 위성도시만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지하철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지 않은 곳도 많고, 출퇴근 시간에는 배차가 이보다는 조밀해지기는 하는데 평시에는 10분에 한 편 정도 다니는 것 같다. 



삿포로 지하철 토호선(東豊線)의 노선도

지하철 노선의 길이도 그렇게 긴 편이 아니다.

 

누가 역명판에 주먹질이라도 했나..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열차 안에 사람은 별로 없고, 열차 안에서는 그냥 조용히 앉아서 갔다. 괜히 관광객 티를 낼 필요도 없으니.. 내릴 역인 후쿠즈미(福住)역은 토호선(東豊線)의 마지막역인데, 여기서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히츠지가오카전망대로 간다. 예전에 이 역에 내려서 버스를 갈아탄 기억은 있는데 어느 길로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나서 사람들이 많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 가니 버스 타는 곳이 나왔다. 이 사람들도 지하철이 여기까지만 다니니 버스로 환승해서 집에 가는 모양인지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이 역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프로야구 닛폰햄 파이터스와 프로축구 콘사도레 삿포로의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삿포로돔이 있는데, 9년 전에는 야구나 축구나 경기를 하지 않는 겨울에 와서 돔 투어를 진행하지 않아서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나왔던 기억이 있다. 입장료가 꽤 비쌌던 것 같았는데 당시에 환율이 100엔에 700원대 중후반이었기에 돈을 뿌리고 다녔지, 지금 같아서는 아까워서 쓰지도 못했을 것 같다.


지하철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버스터미널이 바로 앞에 보인다. 15시 20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 버스 시간을 여유 있게 한다고 해도 도로 위를 달리는 경우라면 여러 변수가 있어서 시간이 더 걸릴 가능성이 있다. 차가 막혀서 늦어질 수도 있고, 하차할 때 요금을 내는 방식이어서 노인들이 내리면서 동전을 세서 내느라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고, 요금 지불 방식에 익숙치 않은 외국인 역시 동전 세다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 때문에 버스가 신호 한 번 놓치면 지연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는데 대부분의 승객들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앞에서 시간을 잡아먹는 사람들을 조용히 기다린다. 반도의 어느 나라라면 쌍욕이 들려올 지도 모르는데..


약 5분 가까이 늦게 버스가 왔는데, 버스를 타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뒤쪽의 빈 자리에 앉아서 간다.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다른 노선의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도 있어서였는지 버스 안에는 빈 자리가 꽤 남은 것 같다.


이런 평범한 동네를 지나간다.


시내 중심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대도시라는 것을 느끼기 어려운 분위기다. 그만큼 한국의 도시는 특히 서울과 수도권을 집약적으로 개발을 한 덕분에 . 200만에 가까운 적지 않은 인구가 사는 도시이고, 관광객도 많은 곳이지만, 인구 천 만이 넘는 곳에서 지내다보니 중간중간 공터가 보이고 스카이라인이 낮은 곳을 보면 복잡한 곳에서 탈출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잠시 후 버스는 히츠지가오카 전망대 앞에 멈췄고, 승객들이 버스 요금을 내고 내리자 아주머니가 나와서 520엔씩 받고 입장권을 준다. 9년 전에도 이런 식으로 기습적으로 입장권을 주고 입장료를 받아갔던 것 같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는 가격이 저렴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입장료가 저렴하지도 않고 이 곳에 특별히 볼 것이 많은 것도 아닌데,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 를 외쳤던 클라크 박사의 동상과 기간 한정으로 볼 수 있는 양들을 보는 비용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밖에 기념품과 식음료를 파는 곳이 있는 정도.


이 곳의 가장 큰 단점은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것이라서, 내리자마자 후쿠즈미역 또는 삿포로 시내까지 돌아가는 버스 시간을 잘 체크해야 한다. "삿포로면 일본 5대 도시 중의 하나라면서요, 대도시인데 버스는 자주 다니지 않겠어요?" 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오산이다. 4월부터 8월까지는 버스가 자주 있지만, 9월부터는 버스 운행횟수가 줄어들고, 10월부터는 동계 시간표를 적용해서 운행하는 버스의 수가 더 줄어든다.


후쿠즈미역-히츠지가오카전망대까지 가는 평일 버스 시각표. (2017년 9월)[각주:1]

왼쪽이 후쿠즈미역에서 히츠지가오카 방면, 오른쪽이 히츠지가오카에서 후쿠즈미역 방면


후쿠즈미역-히츠지가오카전망대 주말, 공휴일 버스 시각표. (2017년 9월)

10월 이후의 시각표는 올라와 있지 않아서 며칠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9년 전에 왔을 때는 양은 코빼기도 안 비치고 눈만 쌓여 있었기에 무척 반가웠다. 형이 여기 너희들 보러 오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썼는데.. 왕복 교통비에 입장료까지 계산하면 대충 1,500엔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언덕의 이름이 히츠지가오카인 만큼 양이 주인공인 곳이니..


이 녀석들 풀뜯느라 정신이 없다.

먹기만 하면 살쪄..


언덕 아래에 멀리 보이는 비행접시처럼 생긴 건물이 삿포로돔. 야구와 축구 모두 하는 곳으로 야구단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 축구단 콘사도레 삿포로의 홈구장이다. 야구장과 축구장의 경기장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경기일정에 맞추어 인조잔디를 이동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잔디 이동하는 비용만  종종 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하고.


드러누운 양친구도 있다.

일어나~ 일어나~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코이노마치 삿포로(恋の町札幌)' 라는 노래가 있는가 보다.

삿포로에서 눈에 띄는 아가씨는 못 본 것 같은데 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2004년에 홋카이도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홋카이도에 야구팀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홋카이도 프로야구 원년 2004' 라고 써 있다. 현재 이 팀의 최고 스타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이고, 지금 LA다저스에서 뛰고 있는 류현진의 팀 동료인 다르빗슈 유 역시 이 팀 출신의 선수였다.


양이라고 해서 흰색 털의 깨끗한 모습을 상상했는데, 일부러 씻기지는 않는지 꾸질꾸질한 모습이다.


사람의 손으로 씻기는 것보다는 자연친화적으로 방목해서 키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왼쪽에 있는 두 마리가 나이가 많고 다른 양들에 비해 덩치가 큰 녀석들인 것 같다. 동물 사회 역시 덩치와 연령에 따라 또래끼리 서로 뭉쳐다니고 그런 것 같은데, 풀을 뜯어도 비슷한 크기의 양들끼리 모여서 풀을 뜯고, 서열이 있는지 다른 양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안쪽에 뜯어먹을 풀이 없어서 그런지 철조망 사이를 뚫고 나오고 싶어하는 것인지..


얘야, 철조망은 뜯어먹는 것이 아니란다..


사람을 하루이틀 본 것이 아니라 그런지 가까이 다가가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제 할 일을 한다.

얘네들한테도 무시당하고 있구나..


저 양들은 철조망을 뚫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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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츠지가오카 전망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삿포로지하철 토호선의 종점인 후쿠즈미역에서 내려 福84번 버스로 환승하여 가는 방법과, 삿포로역 남쪽 출구로 나와서 토큐백화점 남쪽에 있는 삿포로에키마에 2번 버스정류장에서 히츠지가오카까지 한 번에 가는 89번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다. 버스에서 내릴 때 아주머니가 달려와서 520엔(성인)을 받고 입장권을 준다. 후쿠즈미역에서는 약 11분 정도, 삿포로역에서 출발하는 경우 약 38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에스타 옆에 있는 삿포로 버스터미널에서는 히츠지가오카 방면 버스가 다니지 않으니 주의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첨부한 JPG파일을 참조를 바라는 바임. PDF로 올리려고 했는데 어떻게 올리는지 잘 몰라서 부득이 JPG로 첨부를 하였다. 일본어로 되어 있으나 눈치껏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기에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1. 실제로 방문했던 시기는 2016년이지만, 작성시기인 2017년 기준의 시각표. [본문으로]


오후 비행기를 예약을 해서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하였지만, 새벽 3시가 다 되어 집에 도착해서 준비를 하다보니 정신이 멍해져서 제대로 짐을 꾸리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간신히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 수속을 하였다. 인천에서 삿포로까지 바로 가는 비행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대개는 혼슈의 다른 도시를 거쳐서 하루 걸려 열차로 육로 이동을 했고, 이틀에서 사흘 정도 홋카이도에서 머물면서 삿포로와 하코다테 정도만 보고 머물다가 인천까지 직항편을 타고 돌아오거나, 아니면 혼슈의 다른 도시로 가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고, 다른 도시에 용무가 있어서 며칠 보낸 뒤에 여정의 마지막 쯤에 삿포로로 이동해서 하루나 이틀 정도 묵고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 지라.


이번에는 패스를 따로 사지 않았는데 지난 달에 쓰다가 남은 청춘18 티켓의 4일분이 남아 있어서 이 승차권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철덕이라면 이 승차권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터인데, 당분간 사용할 계획은 없어서 사용하는 날부터 자세히 설명을 할 예정인데, 이것 때문에 4일 동안 하루 종일 보통열차를 타고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 후라노, 비에이에 갔다가 다시 삿포로에 돌아와 하코다테를 거쳐 토쿄까지 다니느라 만만치 않은 여정을 이어가게 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금전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조금 더 보태서 단기체재 외국인이 구입가능한 JR패스나 홋카이도 레일패스의 구입을 추천하고 싶다. 이거 좀 아껴보겠다고 하루 종일 열차 타고 다니다가 개고생만 죽어라 해서 몸이 축난다는..


공항리무진버스를 타고 인천대교를 건너고 있다.

여러 번 다니다보니 이제는 별 감흥이 없어졌다.


인천 출발 시각이 오후이고, 8월 말이어서 홋카이도의 성수기를 지나서인지 빈 자리가 꽤 많았다. 덕분에 비행기 뒤편에는 사람이 없어서 부대끼지 않고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신치토세공항까지 한 번에 가는 직항 비행기를 탄 것은 처음인데, 지금까지 삿포로가 여정에 포함된 경우는 토쿄나 오사카, 혹은 후쿠오카로 입국을 해서 삿포로까지 육로 이동을 주로 했다. 요즘에는 저가항공사들도 인천-삿포로 노선을 경쟁적으로 운항하고 있지만, 얼리버드로 구입하지 않는 이상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서 다른 도시를 거쳐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귀국할 때만 신치토세공항에서 인천까지 직항편은 여러 차례 탄 기억이 있다.


삿포로는 대한항공 독점의 노선이었는데, 저가항공사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면서 대한항공의 동생 진에어는 물론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에 이어 제주항공까지 취항하고 있다. 아시아나는 삿포로가 아닌 아사히카와 노선이 있었지만, 이 노선의 수익성이 좋지 않았는지 언젠가부터 정기 운항은 하지 않고, 종종 이벤트성으로 전세기 형식으로 가끔 운항하는 것 같은데, 요즘에는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항공권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고 여행사를 통해서 모객을 해서 손익분기점이 넘어서면 운항을 하는 것 같더니 2년 전부터 삿포로 직항편을 취항했다. 시간대가 애매한 것이 단점이기는 하나 처음부터 오후 출발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이 항공편을 이용하게 되었다.


FSC의 장점이라면 이렇게 기내식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속이 조금 더부룩해서 소화 촉진을 위해 맥주가 있는가 물어봤더니 없다고 해서 탄산음료라도 있는가 물어봤더니 없단다. 여기는 탄산이 들어간 음료는 아예 취급을 안 하는가보다. 최근에는 단거리만 타서 잘 모르겠는데 언제부터 얘네들이 이렇게 짠돌이가 되었나. 삿포로면 두 시간 이상 걸릴텐데..


그래도 주는 음식을 먹어두어야 식비가 줄어들기에 먹는다.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앤디 우드 교수는 2010년 10월 ‘음식품질과 선호'(Food Quality and Preference)에 실린 논문에서 소음과 맛의 관계에 대해서 밝혔다고. 그는 소음이 증가할수록 음식의 맛을 사람들이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앤디 우드 교수는 48명의 실험자의 눈을 가린 뒤 이들에게 비스킷과 감자 칩과 같은 맛있는 음식을 주고 헤드폰을 쓰게 하면서 소리에 따라서 맛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지 실험을 했는데, 실험자들은 소리가 커질수록 단맛이나 짠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주의가 분산되기 때문이라고. 그렇다고 착륙 후에 기내식을 먹겠다고 할 수도 없고..[각주:1] 


동해를 지나고 있다.

 

조금 더 가다보니 하늘이 흐려졌다. 태풍 라이언록의 영향으로 일본으로 가는 일부 항공편이 결항되어 못 갈 수도 있었는데, 이 항로에서 이 시간대는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정상적으로 운항을 하였다. 태풍이 약해졌다거나 예상진행경로에서 벗어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아직 태풍의 영향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고.


빈 자리가 꽤 많은 기내 역시 조용하다.

성수기를 피하면 비행기 가격도 내리고, 사람도 적어서 좋기는 한데, 이 시기라면 후라노의 라벤더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후라노는 지난 달에 다녀왔으니 굳이 다시 가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보다 일단 태풍이라는 녀석이 온다니 무사히 넘어갔으면 좋겠다.

 

심지어 햇빛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태풍인지 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논밭이 보이는 것을 보니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이제 정말 다 왔다.

 

웰컴 투 홋카이도.

홋카이도 한정 삿포로 클래식 맥주가 환영을 해준다.

그래 반갑다.


신치토세공항은 국내선과 국제선 터미널로 나뉘어 있는데, 수시로 다니는 국내선과 달리 국제선은 한가한 편이다. 터미널 규모를 보아도 국내선 터미널이 국제선 터미널보다 큰데, 국제선의 절반 이상은 한국에서 오가는 여객기이고, 중국, 타이완, 홍콩 등에서 오가는 비행기들이 있다. 당연히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입국 심사는 아주 간단히 끝났고, 짐을 찾아서 공항을 빠져나갈 준비를 한다. 신치토세공항에서 삿포로 시내까지 가는 방법은 공항버스, 철도,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이들에 한해 택시라는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고, 차량을 빌려 렌트카로 돌아다니는 방법도 있다. 

홋카이도의 주요 도시는 철도로 연결이 되어 있지만, 삿포로 근교를 제외하면 열차가 드물게 다니고, 면적으로 따지자면 대한민국 정부의 실효지배권에 있는 영토의 약 83%에 이르므로, 일본 여행을 가서 오사카 및 칸사이권 여행을 하는 것과 달리 도시 간 이동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철도가 그나마 자주 다닌다고 할 수 있지만, 삿포로에서 도내 지방 거점 도시까지 가는데 특급열차로도 5시간 전후 걸리고, 항공편은 가격이 무시무시하고 하루에 한두 편 있을까 말까하여 원하는 시간대에 타기 어려워서, 결국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로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잡은 것이 거의 10년 전인데다 중간에 맥주라도 마시기 부담스럽고, 혼자서 운전하며 다니는 적막함과 귀찮음, 그리고 이동 중간에 쉬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아서 포기했다.


슈타이프 페스티벌 플라자라는 것이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 유럽 쪽에는 아주 취약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스테프 핫도그 밖에 없다. 


헬로키티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삿포로 클래식 맥주와 로이스 초콜릿, 유바리 멜론 젤리..

저런 것은 지금 사면 짐이 되니까 나중에 갈 때 사든가 하고, 지금은 우선 짐을 가지고 호텔로 가는 것이 먼저다. 곧장 신치토세공항역으로 가서 스이카를 찍고 들어가려는데 잔액이 모자라서 천 엔을 충전한 뒤에 카드를 찍고 열차에 탔다. 아직 퇴근러쉬가 불을 뿜는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용케 빈 자리가 있다. 지정석인 U시트를 제외하면 자유석이라서 먼저 앉아서 가는 사람이 임자다. 청춘18 킷푸를 사용하는 거지 주제에 520엔이 더 필요한 지정석 U시트는 차마 꿈꿀 수 없다. 


일본은 철도노선이 여기저기 있기 때문에 매달 JR시각표라는 책을 정기적으로 발행한다. 이 책에는 당연히 모든 신칸센과 JR재래선 및 최근에는 모바일판으로도 나오는 모양인데, 이 책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그녀를 철덕이라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요즘에는 인터넷을 통해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쉽게 시각표를 확인할 수 있기는 하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이라서 그런지 책장을 넘기며 시각표를 확인하는 것이 더 익숙해서 종종 매표소에 가서 시각표를 뒤져서 찾아보게 된다. 사실 돈 주고 이 책을 사는 것은 짐만 되고 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시각표를 안 사면 아이스크림 몇 개 사먹을 수 있는데..


치토세역에 정차. 지정석 U시트는 지정석 요금 520엔을 추가로 내야 하므로, 빈 자리가 많은 자유석에 앉아서 간다. 어차피 이번에는 가난한 상태로 골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고된 여정이므로 이렇게 빈 자리가 많은데 쓸데없이 돈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돈을 아끼다가, 나중에 크게 펑 터뜨려서 빚쟁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 문제이기는 한데..


에니와역에 정차

홋카이도에 최소 두 자릿 수 정도 온 것 같은데 에니와역에 내린 적은 없다. 이 근방에 무엇이 있던가..


키타히로시마 정차. 이름처럼 혼슈에 있는 히로시마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개척한 동네라고 해서 이름 역시 북쪽의 히로시마라는 뜻의 키타히로시마(北広島)가 되었다고 한다. 홋카이도 남부와 동부에서 열차로 삿포로에 갈 때는 반드시 키타히로시마를 지나게 된다. 그 다음 정차역은 신삿포로인데, 이 역은 귀찮아서 그냥 무시하고 사진을 안 찍었다. 일본에서 역명에 '신(新)'이 붙는 역은 신칸센 역이 많은데, 신요코하마, 신후지, 신오사카, 신코베, 신쿠라시키, 신오노미치, 신이와쿠니, 신야마구치, 신하나마키, 신시라카와, 신하나마키, 신아오모리, 신하코다테호쿠토 등이 그런 예인데, 신삿포로역은 신칸센이 들어올 계획은 없는 듯하다. 

 

삿포로역 도착.

쾌속 에어포트 중에는 삿포로까지만 운행하는 열차와 오타루까지 운행하는 열차가 있다. 대개 신치토세공항에서 15분 간격으로 열차가 있는데, 두 편은 삿포로행, 그 사이는 오타루행으로 운행한다. 신치토세공항에 내려서 바로 오타루로 가고 싶다면 오타루행 열차를 타고, 삿포로에 가려면 아무 열차나 타면 된다.


반대쪽 승강장에 아사히카와행 특급 수퍼 카무이가 있다. 그런데 2017년부터는 앞에 붙은 '수퍼' 가 빠진채 그냥 카무이라는 이름으로 운행하고 있다. 같은 구간을 달리는 일부 열차는 라일락이라는 예전에 운행하던 열차를 부활시키기도 했는데, 카무이는 그린차가 없는 열차, 라일락은 그린차가 있는 열차라고 한다. 세이칸터널 구간에서 아오모리와 하코다테를 오가던 789계 전동차들이 실업자가 되어 이 녀석들을 재취업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방송국에서 나와서 뭔가 취재를 하고 있다.

내 모습도 잠깐 나왔을 것 같아서 밤새 뉴스를 보았는데 안 보임..


저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일단 숙소에 가서 짐을 내려놓고 쉬어야겠다. 밤을 새고 왔더니 슬슬 긴장이 풀리려고 해서 짐을 끌고 밖에서 돌아다니다가는 뭔가 사고를 치거나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삿포로역의 와이파이에 접속해서 송영버스 시간을 보니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단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내일 무엇을 할 지 웹 검색을 하다가(당연히 구체적인 계획은 늘 하지 않기에..), 관광안내소에 들어가서 팸플릿 몇 장 집어온 뒤 나가서 버스를 탔다. 몇 번 묵었던 적이 있는 곳이라서(물론 호텔 측에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버스 기사 분은 야구를 좋아하시는지 저녁 시간에 타면 라디오 야구 중계를 틀어놓으신다. 

버스를 타고 편하게 도착한 뒤 체크인을 하고, 텔레비전을 켜고 기상상황을 살펴보면서 잠시 침대 위에 누워서 쉬다가 로비로 내려가서 생맥주 한 잔을 마시고, 사우나에 들어가 땀을 흘린 뒤에 저녁을 먹으러 간다. 삿포로에 맛있는 것이 많고도 많지만, 피곤해서 그냥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마츠야가 눈에 띄었다.


잠이 잘 오도록 생맥주 한 잔 시키고 야마가타다시규야사이메시(山形だし牛やさいめし) 오오모리로 하나 시킨다. 마츠야는 점원에게 직접 먹을 것을 주문하는 방식이 아니고, 입구 근처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돈을 넣고 식권을 뽑아서 점원에게 주는 방식이다. 자동판매기가 한국어도 지원하므로 쉽게 사용할 수 있으나, 음식 정도는 일본어로도 큰 무리가 없으니 그냥 시키고, 잔돈을 챙겨 빈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식권을 건네면 잠시 후 이렇게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생야채가 딸린 세트를 시키면 야채를 따로 주문하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세트로 시켰던 것 같다. 먹고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는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런 음식은 처음이어서 호텔로 돌아가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야마가타현에서 밥 위에 이렇게 오이나 가지 같은 야채를 잘게 썰어서 낫토나 다시마를 넣고 술과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는 것 같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음식점 직원이 잔반처리하지 않아도 되도록 깨끗이 먹어주는 친절한 고객이다. 배가 부르니 호텔까지 슬슬 걸어서 갔는데, 방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날씨가 막 험악해지면서 바람이 거세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태풍의 영향권에 들은 것 같아서 혹시 모르니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를 보다가 언제 재난 경보가 발령될 지 모르니 소리를 살짝 줄여놓고 잠을 청했다. 




- 잠꾸러기의 원포인트 가이드

<신치토세공항에서 삿포로 시내 가기>

열차 : JR 쾌속에어포트 15분 마다 운행. 약 37분, 1,060엔. 지정석 U시트는 지정석권 520엔 추가, U시트 이외의 좌석은 그냥 승차권만으로 승차 가능.

        삿포로 종착 열차와 삿포로 정차 후 오타루까지 가는 열차를 번갈아 운행한다. 

        쾌속열차는 어느 정도 이용자가 많은 역에만 정차하므로, 하차하려는 역을 통과하는 경우는 하차역 직전 정차역에서 내려 보통열차로 갈아타면 된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그냥 삿포로 방면 각역정차 보통열차에 승차 후 약 55~60분 정도 소요.

리무진 버스 : 츄오버스(Chuo Bus)와 호쿠토버스(Hokuto Bus)에서 운행하며, 삿포로역 및 주요 호텔에 정차한다.

                아침 이른 시간과 19시 이후를 제외하고 매시간 약 4~5편의 버스가 다닌다. (도심 기준) 약 65~80분 소요. 1,030엔. 열차보다는 가격을 저렴하게 한 것인가..


  1. 출처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569755.html [본문으로]

호주는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시차는 크지 않지만, 1~2월에는 낮이 길어짐에 따라 활동시간이 길어진다. 멜번은 호주에서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해가 일찍 뜨고 일찍 지는 덕분에 오후 8시까지는 조명이 없이도 야외활동에 큰 무리가 없다. 여기에는 Daylight Saving Time(일광절약시간제)이라는 우리에게는 서머타임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시간변동제도의 영향이 있는데 10월 1일부터 익년 4월 1일까지 시드니가 위치한 뉴사우스웨일즈와 멜번이 위치한 빅토리아, 그리고 타즈마니아는 한 시간이 더 빨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는 한국과의 시차는 2시간이 된다. 이 시기보다 2년 후에 머물렀던 애들레이드가 있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는 평소에는 한국보다 30분 빠르고, 일광절약시간제가 실시될 때는 1시간 30분이 빠르다. 호주오픈이 열리는 이 시기는 당연히 일광절약시간제가 실시되고 있어서 오후 8시 전후까지 날이 밝다.


시내 구간을 무료로 탈 수 있는 시티 서클 트램이다.


멜번에는 트램마다 광고를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호주오픈 테니스가 열리는 기간 막바지에 오스트레일리아 데이(Australia Day)라는 호주의 중요한 국경일이 있다. 매년 1월 26일을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라고 하여 기념행사를 하는데, 한국식으로는 '호주의 날' 정도 되겠다. 당연히 국경일로 공휴일이며, 호주 전역에서 여러가지 축하 및 기념 행사가 열린다. 시기상 대개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의 막바지, 가장 관심이 가는 4강 또는 결승전이 열릴 때쯤과 겹친다.

 

경찰 언니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옆에는 친구들인가..

굉장히 자유로운 모습이다.

 

페더레이션 스퀘어

호주오픈이 열리는 시기에는 이 곳에서 스크린을 통해 경기를 볼 수 있고, 채널 7에서 거의 대부분의 호주오픈 경기를 생중계로 보여준다.


건너편에는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이 있다.
앞의 글에서 한 번 언급했던 것 같은데,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의 일부 장면이 이 도시를 배경으로 등장했다.

 

호주에도 SBS라는 방송국이 있다. 한국의 SBS와는 관계는 없는 곳이고, 호주가 다인종 국가가 되다보니 이런 소수인종 사람들의 호주 정착에 도움을 위해 만들어진 채널이라고 한다. 다양한 국가의 방송을 보여주며, 종종 한국의 프로그램도 이 채널을 통해 방송되기도 한다고. 나는 새벽 시간에 가끔 UEFA챔피언스리그 축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호주는 AFL이라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가 있는데, 얘네들이 풋볼이라고 부르는 이 경기는 미식축구와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것이 있는 정말 호주에서만 볼 수 있는 경기다. 한국에서 종종 NFL경기를 보기도 했지만, AFL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경기 규칙도 잘 모르겠고, 별 재미도 없고 해서 거의 안 보았다. 호주의 영어가 영국식 영어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의 예로 football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는데, 이 나라에서 football은 AFL을 의미하지, 4년에 한 번 월드컵이 열리는 FIFA주관의 그 11명이 뛰는 경기를 말하지 않고, soccer라고 한다. 그럼에도 다른 많은 부분에서는 영국식 영어 및 문화, 제도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지만, 미국의 영향도 상당히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발음이 영국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식인 것도 아니고 적당히 잡종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야라강(Yarra River)

호주오픈에서 우승한 선수들이 종종 이 강에 뛰어드는 세레모니를 펼치기도 한다. 가뜩이나 더운 멜번의 날씨에 누구라도 강에 뛰어들고 싶겠지만, 이 강의 깊이가 평균 10~15m 정도 된다고 한다.

테니스 경기 일정이 저녁에 남자단식 준결승 경기가 있기는 한데, 남자경기 가격이 더 비싸기도 하고, 그나마 가격 면에서 저렴한 구역의 자리는 빈 자리가 없어서 그냥 페더레이션 스퀘어에 앉아서 대형 화면으로 봐야할 것 같다. 그렇다고 비싸게 팔리는 입장권을 구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대회 초반의 1라운드 경기는 저렴한 편에 속하지만, 시드 배정을 받은 톱랭커의 경기는 진작에 매진이 되었고, 학생비자를 가지고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출석률을 신경쓸 필요조차 없지만, 기껏 수업료를 내고 영어를 배운다고 하고 있기에 수업은 최대한 빠지지 않으려고 일정을 계획해서 여자 준결승 세션 하나만 구입을 했고, 오가는 것도 늦은 밤과 이른 아침 비행기로 예약을 했는데 토너먼트 대회에서 용케 샤라포바의 경기를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고..

지난 밤에 유럽 출신의 젊은 친구들과 옥상에서 술을 마시면서 놀고, 아침에는 네덜란드와 다른 유럽에서 온 녀석들을 따라서 보타닉 가든에 갔다. 쟤네들은 햇빛이 쨍쨍한 날씨에도 피부가 잘 타지 않는데, 나의 귀하디 귀하신 살갗은 이 정도의 햇빛에 노출되면 금방 벗겨지는지라 전신에 썬크림을 바르고 밖으로 나갔다.


흔히 네덜란드 사람들을 더치(Dutch)라고 부르는데, 프랑스나 영국 출신의 사람들보다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다. 프랑스인들은 콧대가 높고, 인종차별하는 것이 눈에 보이고, 더치들은 티를 내지 않아서인 것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잠깐 본 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겠지만..


그래도 멜번이라면 호주에서 시드니 다음가는 대도시인데 이렇게 한가롭다. 호주에서는 지역(주)에 따라서 12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 및 연말연시를 포함한 하계 방학에 들어가는데, 계절이 정반대라 그렇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들은 북반구의 북미와 서유럽처럼 크리스마스 전후부터 연초까지 긴 연휴를 보내는 곳이 많다. 호주가 있는 오세아니아 지역에서는 호주와 뉴질랜드 말고는 국제사회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미약하고, 그렇다고 반도의 어느 나라처럼 핵을 앞세운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얼레.. 사진이 흔들렸네..

 

이런 동상도 있다.


이런 한가로운 일상을 아시아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덕분에 호주에서의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고자 이민을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어린 시절부터 그 여유로움을 누리며 자라온 사람들과, 계속해서 학교와 회사 등에서 치열하게 버텨온 사람들의 모습이 같을 수는 없을 터.


멜번의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건물들. 금융, 회계업체들이 대부분인 듯하다. 호주에는 제조업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나마 식품, 그것도 육류나 유제품 가공업체들이 조금 규모가 있다 뿐이지, 공산품을 만드는 업체는 거의 없다. UGG부츠가 그나마 유명한가..


조정인가 카누인가..


호주의 한 가지 문제로는 복지가 좋은 편이어서 사람들이 굳이 공부나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라는데, 그래서 여전히 고급 인력들을 해외에서 수혈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 등에서 회계학을 전공하여 회계사가 되거나, IT관련학과를 졸업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북미보다는 아무래도 호주나 뉴질랜드 쪽의 문호가 넓고 인재 부족이 심해서 더 많은 기회가 있고, 정착하기 쉬운 편이라고 한다. 나는 애초에 이 곳에 거주할 생각은 거의 없었지만..


함께 보타닉 가든에 간 일행. 이름을 잊어버렸다..

 

햇빛이 쨍쨍해서 썬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라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굉장히 한가롭다.

 

스티븐이라는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청년. 얘들이 더 늙어보이기는 하지만, 대학을 몇 년 다녔고, 중간에 휴학도 하고, 군복무도 했기에 실제로는 내가 최소 서너 살 이상 많은 연장자가 되겠다. 그러나 이들과는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이름 부르고 존댓말이 없는 영어로 몇 마디씩 주고 받으면서 이야기를 하면 끝이다. 얘네들은 이렇게 햇빛에 몸을 노출해도 별 탈 없다는 것이 그저 부럽다.

 

새들도 편하게 쉬고 있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시간.


결혼식도 열리고 있다.

여기의 결혼식은 한국에서처럼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니다. 신랑, 신부가 정말 자신들의 결혼을 축하해 줄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불러서 소박하게 결혼식을 한다. 한국의 결혼식은 신랑, 신부의 부모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가 되어 축의금을 얼마나 해야 하는가 고민을 해야하는데, 사람 수는 적지만 정말 모두 즐겁게 이 결혼을 축복하고 즐기는 모습이라 부럽다.


혹시 모를 돌발 사태에 대비한 경호원도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술 마시고 깽판 치는 녀석들이 많아서 그런지경호원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자녀의 결혼이 부모의 행사인데 반해, 축하하러 온 부모를 제외하면 신랑, 신부와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서 결혼식을 한다고 한다.


작지만 실속있는 결혼식 같다. 한국에서라면 축하하는 마음은 별로 없지만 나중에 돌려받을 생각하고 축의금 보내려고 가는 경우도 많을텐데..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독서를 즐기기도 하고

 

중년 부부도 조용히 데이트를 하고 있다. 이런 모습 참 부럽다.


일행들과 함께 다시 야라강을 건너서 북쪽으로 간다. 나는 저녁 때 페더레이션 스퀘어에서 테니스 경기를 보려고 하는데, 이 친구들은 백패커스로 돌아가서 옥상에서 술을 마신다고 한다. '파티' 라고 하는데, 파티라는 것이 특별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으로 모여서 마시고 먹고 떠들면서 노는 것을 파티라 칭한다.


가는 길에는 구름이 끼어서 햇빛을 가려주니 시원하다. 바다가 멀지 않지만 건조한 기후라서 한국의 여름처럼 덥고 습한 날씨가 아니어서 햇빛만 피하면 지내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멜번은 1월에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5도 전후를 기록하는데, 호주에서도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호주의 날씨가 더워지고, 가뭄과 홍수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고.


플린더스 스트리트역

멜번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의 하나. 1854년에 건축되었다는 역사 깊은 건물이다. 아마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하다' 에서 나왔던 것 같은데.. 이 드라마가 방송되기 얼마 전에 입대하여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이었던데다, 전입 후에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면서 드라마를 보기는 커녕 잠잘 시간도 없었고, 여기에 갔을 때는 그 드라마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저 테니스와 그레이트 오션로드를 보기 위해서 갔기 때문에.

멜번 시내에는 여러 철도역이 있는데, 철도노선이 여러 개인데다가 운영하는 회사가 다르기도 해서 외부에서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은 헤매기 쉽다. 플린더스 스트리트역은 주로 멜번 근교의 지역으로 이어지는 열차를 타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브리즈번에서는 몇 번 열차를 타보기는 했지만 영 분위기가 별로인데, 멜번에서는 열차를 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 같다. 사실 땅이 워낙 넓은 나라인지라, 교외에 사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어서 집도 없고, 차도 없는 사람들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함께 왔던 네덜란드인들은 백패커스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나는 잠시 야라강 주변 야경 사진을 찍고, 페더레이션 스퀘어에서 남자 단식 준결승전을 보기 위해 남을 생각이어서, 밤에 호스텔에서 보자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여자부 4강전 첫 경기와 다음 경기 사이에 쉬는 시간이 생겨서 잠시 밖으로 나와서 로드 레이버 아레나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들어왔다.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이 된데다 어제 밤부터 강제로 단식을 계속해왔으므로 뭐라도 먹어야겠는데 늘 돈이 발목을 잡는다. 5.5달러였던가 했던 핫도그로 적당히 끼니를 때우고 경기장 주변을 한 바퀴 슬슬 걸어서 돌아본 뒤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선수들이 경기를 할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 경기 전에 선수들이 몸을 풀 때나 쉬고 있을 때는 혼자서 할 일이 없다. 앉은 자리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편하기는 하지만 말 한 마디 나눌 사람이 없으니 금방 지루해졌다. 영어가 짧아서 대화가 잘 되지 않았겠지만..


아나 이바노비치

이 때만 해도 이바노비치가 샤라포바와 함께 여자 테니스를 주름잡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테니스 선수로서의 전성기가 짧았다. 2008년 프랑스오픈 우승 후 잠시 세계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한 달 후에 열린 윔블던부터 하락세를 보여 시드 배정조차 받지 못한 중국의 정제에게 덜미를 잡혀 일찌감치 탈락하는 등 들쑥날쑥한 성적을 내면서 랭킹이 떨어졌고, 테니스로 주목받는 것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반대로 가십이나 남자관계로 주목받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잠깐 회복하는 듯하다가 다시 가라앉고, 작년에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결혼을 했다.


좌우로 폴짝폴짝 뛰고 있다. 공이 오는 방향으로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감 유지를 위해서일 것 같다.


모처럼 앞모습 사진을 찍을 기회였으나, 셔터스피드가 따라가지 못했다..


서브를 넣기 전.


예상 밖으로 한투코바의 일방적인 경기로 흘러가고 있다.


상대인 다니엘라 한투코바 

비록 단식에서 그랜드슬램 우승은 커녕 결승에도 올라간 적도 없고, 토너먼트 대회에서 얻은 트로피도 손에 꼽을 정도이기는 한데, 경기에 많이 참여하면서 포인트를 올려서 랭킹을 끌어올린 하드워커라고 해야겠다. 여기에 복식과 혼합복식도 출전하는 경우가 있으니 '질 보다는 양' 을 택한 것인지도. 한투코바 역시 예쁜 외모로 주목을 받아 실력에 비해서 조금 더 유명세를 얻은 면도 없지 않지만, 출신국가인 슬로바키아의 인구가 5백만 남짓에 불과하고, 테니스 스타일이 점잖아서 그런지 시끌벅적하게 소리를 질러대는 친구들보다는 인기가 떨어지는 편.


한투코바가 메이저 대회 단식에서 4강까지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첫 세트는 일방적으로 점수를 따내며 6-0으로 손쉽게 승리했으나, 2세트부터 본격적인 경기가 펼쳐졌다.

 

한투코바의 서브

사진의 질이 대단히 좋지 않아서 참 그렇다.
이것은 다 날씨가 좋지 않아 지붕을 닫은 것과 고물 카메라 탓이다.


카메라 셔터 스피드가 못 따라가서 한 번에 찍지는 못하고 각기 다른 서브 상황에서 찍은 사진을 연결해보았다. 하나의 연속되는 동작의 사진은 아니고, 


서브를 넣기 전 바닥을 보는 한투코바


서브 토스를 하고

 

강하게 서브를 때린다


이바노비치의 리턴


리턴에 실패했다..


득점에 성공한 한투코바는 즐거운 마음으로 볼보이로부터 공을 받았다.


서브를 위해 엔드라인 쪽으로 걸어감


서브에 들어가는 준비 동작


토스 후에 점프


공중에서 서브를 위해 백스윙


이바노비치의 강한 서브


서브 후 연속동작


저 스윙에 맞으면 골로 갈 것 같다.


착지

여기까지..


포핸드 스트로크


백핸드 스트로크를 날리는 이바노비치


그러나 이 게임 역시 이바노비치가 내주고 말았다.

1세트 마지막 게임은 한투코바의 서브게임.


이바노비치는 한 게임도 못 따고 세트를 내줄 위기에 처했다.


이바노비치는 1세트의 향방이 달린 여섯 번째 게임 역시 고전하는데..


이바노비치가 1세트에서 한 게임도 못 따고 퍼펙트로 지고 말았다. 토너먼트 대회 초기에나 나올 법한 일이 이런 그랜드슬램의 4강에서 나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누가 뭐래도 한투코바가 이바노비치를 이기고 결승에 진출할 것 같았다.


이바노비치가 1세트를 0대 6의 치욕적인 점수로 내주고 코트체인지를 하고 있다.


경기 중간 잠시 쉬고 있는 이바노비치


한투코바도 쉬고 있다.

경기가 일방적인 한투코바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는데 2세트에서는 접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바노비치의 결정적인 브레이크로 6대 3으로 세트를 따내면서 마지막 세트로 이어지게 된다.


땀을 닦는 이바노비치


이바노비치가 포인트를 얻은 다음에 즐겨하는 세리머니 포즈


이바노비치의 득점 후에는 항상 저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세트에서 한투코바는 4대 3으로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바노비치는 연속으로 세 게임을 따내 마지막 세트에서 이기며 대역전승을 거두면서 결승에 진출하여 샤라포바와 맞붙게 되었다.


전광판에 나오는 한투코바의 표정


구입했던 티켓으로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볼 수 있는 데이 세션 경기는 다 봐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남자 4강전 경기는 나이트 세션 경기라서 따로 티켓을 구입해야 하는데, 시간대도 시간대지만, 남자 경기가 더 박진감이 있어서 그런지 이 경기는 대부분의 좌석이 다 팔렸다. 취소하여 남은 좌석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자리가 좋지 않은 편이고, 여러 경기를 볼 수 있는 데이 세션 입장권과는 달리 한 경기만 볼 수 있음에도 가격이 더 비싸서 사기는 부담스럽고. 그냥 밖에 나가서 페더레이션 스퀘어에서 앉아서 보거나 펍에 가서 텔레비전 중계를 보는 것이 더 낫다.


경기가 끝나고 이바노비치가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다.


호주의 채널 7(Seven)에서 단독으로 호주오픈 테니스 경기 생중계를 한다. 뉴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규프로그램은 결방되고, 테니스 경기 중계를 하는데 대회 초반에는 톱랭커들의 경기가 프라임타임이 아닌 시간대에도 있기에 대부분을 테니스 중계에 시간을 할애한다. 토너먼트 대회의 특성상 대회가 진행될수록 생존하는 선수들이 적어지므로 이 채널의 저녁시간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하는 사람들이라면 테니스가 원망스럽겠지만, 테니스 팬이라면 아주 반가운 일이다. 

 

기아자동차가 이 대회의 공식 스폰서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것 같은데..


세션이 끝났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밖으로 나갔다. 한꺼번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을 피해 조금 기다렸다가 나간다. 이 시간에 나가봤자 사람들만 많고 바깥 날씨는 더우니.. 냉방시설이 있기는 하지만 별로 시원하지 않다고 한다.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와서 가만히 앉아서 경기를 보는 경우라면 조금 썰렁한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냉방을 가동해도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땀이 식지 않을 정도에 맞추어 할테니 냉기가 직접적으로 나오는 곳이 아니라면 많이 시원하거나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로드 레이버 아레나의 천장


마거릿 코트 아레나

그라운드패스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코트 중에서 가장 좋은 코트다. 이 경기장에는 남녀 단식 경기 중에서 중요도에 따라 로드 레이버 아레나와 하이센스 아레나에 배정된 경기 다음으로 높은 랭커의 선수 또는 인기 선수들의 경기가 배정된다. 이 시점에서는 이미 각 부문에서 4강전을 진행하고 있어서 이 경기장에서 그 경기들이 열리지는 않고, 주로 복식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테니스에서는 남녀 단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상금 역시 가장 많으며, 이 종목의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조금 전에 있던 로드 레이버 아레나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


메인 경기장인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 경기가 있을 때는 저 전광판에 경기 중계 영상을 틀어준다.


메인 경기장인 로드 레이버 아레나

어차피 경기장 내에서 볼 수 있는 경기가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피곤하니 잠시 호스텔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 천천히 걸어서 시내를 구경하면서 가보도록 한다. 아침에 비싼 택시비를 내고 온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드는데 처음이라 이런 시행착오를 겪는다고 위안을 삼는다.


최근 10년 동안 단식 우승자 사진을 전시해두었다.

안드레 애거시가 가장 눈에 먼저 띄었고..

 

1998년 우승자 마르티나 힝기스.


힝기스는 1997년에도 우승을 했었고, 이 때만 해도 샘프라스도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시절이었네.


우승 트로피 사진

 

멜번 파크(Melbourne Park)라 불리는 테니스 공원. 주요 경기는 돔형식으로 된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열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경기 또는 인기가 있는 경기는 하이센스 아레나에서 열린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하이센스 아레나가 아닌 보다폰 아레나(Vodafone Arena)라는 이름이었는데, 중국의 궐기로 하이센스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다음 해부터는 네이밍 스폰서가 하이센스로 바뀌었다. 보다폰은 예전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에 로고를 달 정도였으나, 역시 돈 전쟁에서 밀리면서 자리를 빼앗겼다.

 


보다폰 아레나


그라운드패스로는 들어갈 수 없는 2개의 유료 경기장이다. 대신 이 유료 경기장의 입장권을 사면 그라운드패스가 따라오게 되기에 자신이 구입한 경기장의 경기는 물론, 멜번 파크에 개방된 경기장에서 열린 다른 경기를 그냥 볼 수 있다. 이런 대회에 처음 와서 그라운드 패스가 무엇인지 몰랐는데..

멜번 시내는 물론 교외지역까지 연결하는 철도가 경기장 주변을 지나간다.

 

대회 막바지인지라 저녁에는 남자 단식 준결승 1경기가 열리는데, 이 경기가 로드 레이버 아레나의 나이트 세션이라서 데이 세션 티켓을 산 사람은 경기장에 들어갈 수 없어서 그냥 돌아간다. 데이 세션은 여러 경기가 있지만,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적기 때문에, 남자부 준결승 경기 하나만 볼 수 있는 나이트 세션 티켓이 더 비싸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으니 이 경기는 백패커스로 돌아가서 텔레비전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경기에 앞서서 두 선수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우선 서로 공을 주고 받으면서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데, 이 경기에서 샤라포바에게 관심이 있지, 얀코비치는 처음부터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은 주로일방적으로 샤라포바를 중심으로 찍었다. 그런데 흐린 날씨로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지는 상황이라 지붕을 닫은 경기장 내에서 사진을 찍으니 셔터스피드가 선수들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서 사진이 많이 흔들린 것도 있다. 그나마 쓸만하다 싶은 것만 골랐는데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샤라포바의 왼손에 공이 쥐어져 있다.


그리고 이 공을 쳐서 얀코비치와 서로 주고 받는다. 워밍업을 할 때는 서로 받기 쉬운 코스로 공을 치는 것이 예의이고, 한 쪽 방향만 고집하지 않고 포핸드, 백핸드 번갈아가면서 공을 보내준다. 


샤라포바의 백핸드

카메라가 고물딱지라서 사진이 이 모양이다..


서브를 넣는 샤라포바. 어이구 길다..


서브 연습을 할 때는 서로 번갈아가면서 상대방이 없는 쪽으로 공을 치는 것이 예의다.


입장권을 늦게 예매해서인지 중간 정도의 좌석인데 거리가 꽤 멀어서 사진 찍기에는 좋지 않았다. 전 좌석이 지정석이어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는 없는데, 예매할 때 빈 좌석이 많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좋은 위치의 좌석들은 기업용으로 판매가 되었거나 여러 스폰서 업체들에 제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기간 중 호주의 TV채널 7에서 대부분의 경기를 생중계하고, 멜번의 페더레이션 스퀘어에서는 대형 스크린에 중계방송 영상을 생중계하고 있다. 돈 없으면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멜번 파크와 야라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페더레이션 스퀘어 바닥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볼 수 있다.


선수들은 양쪽에서 서로 빈 곳을 향해서 서브를 하면서 몸을 풀었다.


덩치가 크다보니 더 역동적으로 보이는 샤라포바

샤라포바의 공식 프로필 상의 신장은 약 188cm, 6피트 2인치인데, 실제로는 190cm를 넘는다는 것이 중론. 남자친구들과 서 있는 사진을 보면 아무래도 여자다보니 키를 실제보다 줄여서 표기한다는 것인데, 샤라포바의 라이벌인 서리나 윌리엄스가 175cm, 비너스 윌리엄스가 180cm인데, 이들과 비교하면 공식 신장보다 더 클 것이라고.


공을 주우러 가는 샤라포바


볼보이가 공을 들어보이며 샤라포바에게 신호를 하고 있다.


심판이 두 선수를 불러모으고 경기 시작을 준비한다.


이제 워밍업도 끝났고, 경기 시작을 준비한다.


워밍업할 때와는 반대로 샤라포바가 왼쪽에 얀코비치가 오른쪽에서 경기를 한다. 여기서 왼쪽, 오른쪽은 내가 앉은 좌석 기준.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기장에 처음 왔는데 어디가 어딘지 알 리가 없으니.. 얀코비치의 서브로 시작을 하는데, 샤라포바가 잠시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하고 있다.


샤라포바가 백핸드로 받아내고 있다. 스포츠 모드인데도 카메라가 구려서 사진이 이 모양이다..


샤라포바가 점수를 얻었고, 왼손 주먹을 불끈 쥐는 특유의 세레모니가 나온다.


서브를 기다리는 샤라포바


백핸드


샤라포바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브 루틴이 있다. 

① 공을 받아서 왼손으로 바닥에 튀긴 후 

② 튀어오르는 공을 라켓으로 다섯 번 바닥에 튀긴 뒤 

③ 왼손으로 공을 잡고 

④ 왼쪽 귓가와 오른쪽 귓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⑤ 공을 바닥에 두 번 튀긴 뒤 

⑥ 상대방을 잠시 주시한 뒤 서브를 한다. 


② 라켓으로 공을 바닥에 튀기는 모습


③④ 왼손으로 공을 잡고 양쪽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


⑤ 왼손으로 공을 잡아 바닥에 2번 튀긴 뒤


⑥-1 공을 잡고 상대방을 주시하고


⑥-2 서브 토스 직전


⑥-3 서브 토스에 들어감


⑥-4 서브에 들어간다


⑥-5 토스 후 스윙


⑥-6 착지 직전

그 다음 서브 장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 생략..



한 번이라도 그 루틴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는지 유심히 봤는데 저러는 것이 몸에 배인 것 같다. 이 서브가 잘 들어가는 날은 경기가 잘 풀리는데, 언제나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서브가 잘 안 들어가서 경기를 망치는 날도 있다. 샤라포바의 가장 큰 천적은 서리나 윌리엄스인데, 데뷔 초기인 2004년에 윔블던 단식 결승과 BNP파리바 WTA 챔피언스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이긴 것이 전부이고, 이후에는 만나는대로 족족 박살나고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서브의 중요성이 큰데 어깨 부상 이후 서브에 약점을 갖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일 듯.

이 경기에서도 샤라포바와 서리나의 대결이 이루어질 뻔하였으나, 8강에서 얀코비치에게 덜미를 잡히며 떨어지고 말았다. 만약 서리나가 올라왔더라면 경기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하늘은 샤라포바에게 행운을 주었다.


무슨 심령사진 같지만 그걸 의도한 것은 아니다..


경기 끝나고 주관방송사인 채널7과 인터뷰하는 모습

결승전에서는 패자 역시 인터뷰를 하기는 하지만, 그 외의 경기에서는 인터뷰는 승자만 한다. 


유튜브에 이 경기 영상(공식영상은 아니고)이 있어서 링크를 걸어두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언제 사라질 지는 모르겠다.


처음에 예매할 때는 이 경기만 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여자 준결승전 이바노비치와 한투호바의 제 2경기 역시 데이 세션에 포함되어 있어서 볼 수 있다고 해서 다음 경기 역시 보기로 한다. 하루 종일을 테니스를 보면서 보내게 되었지만, 지난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돌아다닐 힘도 없고 앉아서 테니스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며 한량 놀이를 하기로 한다.


비행기 앞 좌석 뒤에 작은 텔레비전이 붙어 있는데 테니스 경기 중계방송을 하고 있었다. 보면서 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광고 화면이 뜨더니 돈을 내고 시청해야 한단다. 1달러 정도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비쌌다. 저가 항공사에 속하는 버진 블루는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서비스는 유료다. 당연히 기내식도 제공되지 않고 승무원들이 카트를 끌고 다니며 음료와 스낵류를 판매하는데 시중의 마트에서 판매하는 것보다는 조금 비싸다. 호주에서 유일하게 기내 서비스가 무료인 항공사는 콴타스 뿐이다.

출발은 늦었는데 얼마 늦지 않고 도착했다. 조금 천천히 갈 것이지 전속력으로 달리다니 조종사들의 퇴근 본능이 발동했나보다. 에잇, 당신들은 집에 가거나 호텔에서 묵겠지만 나는 공항에서 뒹굴어야 한다고! 그렇다고 기내에서 난동을 부릴 수도 없고(당연히 기내에서 난동을 부리면 형사 처벌을 받는다), 조용히 마리 선생님이 주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원서를 읽으며 갔다. 생소한 내용이 아니면 적당히 이해는 하는데 읽는 속도가 느려 한 장 넘어가는데 30분씩 걸렸다.

이미 시간이 12시를 넘어섰기에 공항의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고, 모두 재빨리 밖으로 나가서 시내로 향하는 교통편을 찾으러 다니기 바빴다. 단 한 번도 공항에 내렸을 때 누군가 마중하러 나온 적이 없었지만 이 때만큼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참 서글퍼졌다. 멜번 공항에서는 매 시간 시내로 들어가는 셔틀 버스가 있지만, 셔틀 버스 비용과 하루 묵을 숙박비라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어서 그냥 공항 주변을 맴돌았다. 멜번 공항에는 터미널이 4개가 있는데 각 터미널에 순서대로 숫자를 붙여 T1, T2, T3, T4라고 부른다. T1은 콴타스와 젯스타가 사용하는 국내선, T3는 버진 블루와 기타 지역 항공사의 호주 국내선, T4는 멜번을 허브로 삼는 타이거 항공의 국내선, 그리고 T2는 국제공항이다. (2008년 시점이므로 현재는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음을 유의하시기를 바람)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국제공항 터미널로 건너갔다. 국제공항은 새벽까지도 비행기의 출도착이 있어서 계속 사람들이 오가는지라 비행기가 도착할 때쯤 되면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관광안내소에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영어가 된다면 여기서 숙박과 교통을 예약해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해서 몇 시간 보내고 아침에 호스텔의 픽업 버스를 타고 들어가고, 돌아가는 비행기 역시 전날 밤에 공항에서 노숙 계획이라 6박 7일의 여정이지만 숙소는 단 4박만을 예약했다. 다행히도 텔레비전이 있어서 은근슬쩍 가서 테니스 중계를 보았다. 호주오픈은 메인 코트인 로드 레이버 아레나(Rod Laver Arena)의 경기 일정을 빡빡하게 잡는 편이어서 마지막에 경기가 있는 선수들은 밤을 새워 경기하는 일이 종종 있다. 3라운드에서 로저 페더러와 얀코 팁세라비치가 4시간 27분 동안 경기를 하면서 일정이 지연되어 휴잇과 바그다티스는 밤 11시 52분에 경기를 시작해서 새벽 4시 34분까지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경기를 자정이 다 되어 시작한 것도 불운인데, 풀세트 접전을 펼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피곤했을까. 어쨌든 밤새 따로 할 일도 없고 공항에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잠시 인터넷이나 할까 기웃거리고 있는데 1달러짜리 동전 하나를 주웠다. 의외로 호주에서는 땅을 보고 다니다보면 동전을 줍는 경우가 많다. 경비가 빠듯한 여정이니 작지만 여행 경비에 보태기로. 

멜번은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날씨가 변덕스럽다. 아침과 저녁은 선선하지만 낮에는 아주 덥다가 종종 비가 내리기도 하고, 밤이 되면 서늘해져서 춥다고 느껴질 정도다. 남반구의 호주는 계절이 한국과 정반대인지라 1월이면 한여름에 해당하여 낮에는 기온이 섭씨 35도 이상 올라가는데, 밤이 되면 15도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져 일교차가 심해 감기 걸리기도 쉽다.


침낭을 뒤집어 쓰고 자고 있는 사람도 있고 공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혼자 외딴 곳에 있는 것보다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옆에서 자는 것이 나을 듯해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모자를 벗고 얼굴을 가리고 누워서 웅크린 채잠을 청했다. 쉽게 잠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밤에 잠을 자두어야 일어나서 힘차게 움직일 수 있으니 어느 순간 잠이 들었는데 추위 때문에 잠에서 깼다. 열량 보충을 위해 먹다 남겨둔 과자를 꺼내서 다 먹었지만 잠을 자면서 체온이 내려갔는지 몸이 덜덜 떨렸다. 긴팔 옷이라면 트랙 수트 하나 가지고 온 것이 전부인데 반팔 티셔츠 위에 하나 걸친다고 추위가 해결될 리 없었다.


저 베개 대신 쓸만한 배낭과 침낭이 얼마나 부럽던지..


잠꾸러기인데 잠이 오지 않을 리는 없지만 밤이 되자 날이 쌀쌀해지면서 추위가 느껴져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짐을 줄이기 위해서 반소매 셔츠와 바지만 가지고 와서 위에 덧입을 옷도 없고, 누워 있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가도 곧 추워서 금방 깨서 옆에 있는 국제선 터미널에 다녀오면서 대한항공이 멜버른에도 취항한다는 소식도 접하고, 다시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와 잠을 청하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날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북반구의 겨울은 남반구의 여름인지라 해가 일찍 뜬다. 추워서 사진이 흔들렸다.


비록 공항에서 노숙을 한 거지이기는 하지만 너무 거지 티를 내는 것은 좋지 않으니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씻고 머리를 매만진 뒤 공중 전화 앞에서 서성거렸다. 사람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지만, 여전히 영어가 익숙치 않아서 전화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할 지 생각하며 연습을 해보다가 백패커스의 수신자 부담 전화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좀 이른 시간인 것 같지만 도착했으니 데리러 오라고. 그랬더니 9시에 픽업 버스가 갈 것이니 기다리고 있으라면서 버스가 가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호주에서 지내면서 한동안 백패커스에 묵었던 것은 숙박비를 절약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계속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자신을 노출시키기 위함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전화로 대화하는 것도 큰 두려움 없이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뻤다.


나도 공식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싶은데..

 

참새도 추운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침낭에서 번데기 놀이를 하는 이들은 잘도 자고 있다. 부럽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늘어나고 시끌시끌해졌고, 추위가 가시기 시작했다.


벤치에 앉아 있다가 공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혹시 몰라서 미리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말로 9시가 되자 백팩커스에서 보낸 승합차가 도착했다. 예약한 백패커스에서 온 것이 맞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하여 차에 올라타고 백패커스 유니폼을 입은 기사와 몇 마디 주고 받았다. 바로 출발할 줄 알았더니 세 명 더 기다렸다가 가야한다며 차 안에서 쉬고 있으란다. 이미 9시간을 기다렸는데 못 기다릴 이유 또한 없어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사이에 세 명의 배낭족이 다가왔고 드디어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운전하는 친구가 시내에 들어서서는 바로 가지 않고 주변의 공원이니 구경할 곳을 돌면서 멜번에 대해서 열심히 안내를 시작했다. 여행자들에게 이런 서비스는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만, 얼른 체크인을 하고 테니스를 보러 가야 하기에 그의 설명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침 시간의 백패커스는 늘 분주하다.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찾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욱 그렇다. 이 곳은 수백 명이 묵을 수 있는 곳이어서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뭐든지 느린 이 곳의 문화는 한국의 '빨리빨리' 와는 거리가 멀어서 뒤에 줄을 몇 명이 서든지 신경쓰지 않고 천천히 여유있게 일을 진행한다. 체크아웃하는 사람들과 농담을 하면서도 시간이 꽤 걸리고, 새로 체크인하려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를 설명해주느라 또 시간이 걸린다. 여기서도 30분 가까이 걸려서 겨우 체크인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예약한 방은 6인실이었는데 이층 침대가 세 개 놓인 방이었다. 어떤 침대를 쓰라고 정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먼저 편한 자리를 찜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무래도 윗층보다는 아래층을 쓰는 것이 편하기에 얼른 가방을 던져두고 영역 표시를 한 후 카메라와 지갑만 들고 밖으로 나섰다. 이미 시간은 세션 시작인 11시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마음이 급했다. 호주 도착 이후 여태까지 단 한 번만, 그것도 친구가 돈을 내서 타봤던 택시를 타고 경기장으로 갔다.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고, 대회 기간만 경기장 근처까지 운행하는 무료 트램이 있음에도 혹시나 경기를 늦어서 보지 못할까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호주의 도심에서 택시를 타는 것은 돈을 길에다 버리는 일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원래 도심에서는 속도를 내기 어렵거니와 특히 멜번은 트램이 지나다녀서 도로가 좁고 신호가 복잡하여 가다가 서는 것을 반복하여 느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사 역시 승객이 바빠서 탄 것을 보아도 느릿느릿 규정을 준수하며 운전을 한다. 내가 급하지만 않다면 이는 참 좋은 것이지만, 속이 좀 탄다. 성질 급한 한국인의 폐해다.

걸어서 약 30분 정도의 거리를 택시를 타고 15분만에 도착했는데 요금이 12달러. 배가 아플 틈도 없이 바로 경기장으로 뛰어갔다. 미리 경기장 표를 구입해놓은 덕분에 금방 들어가서 내 자리를 찾아 헤맸다.

 

거금 134.9 달러를 주고 산 여자 단식 준결승전 입장권

경기가 열리는 로드 레이버 아레나(Rod Laver Arena)는 호주의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 로드 레이버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경기장인데, 해마다 호주오픈이 열리는 멜번 파크의 메인 경기장이다. 로드 레이버는 메이저 대회들이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오픈 시대에 처음으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선수이며 1969년 한 해에 그랜드 슬램을 모두 제패한 달성한 유일무이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경기장은 개폐식 지붕이 있어서 날씨에 따라 지붕을 열고 닫는데 날이 흐린 탓에 지붕을 다 열지 않고 반 정도만 열어 놓고 있었다. 로드 레이버 아레나 다음의 위치인 하이센스 아레나(Hisense Arena)는 중국의 전자업체 하이센스가 네이밍 스폰서로 참여한 경기장으로 대회 초반에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소화가 불가능한 상위권 선수들의 경기가 열리는데, 이 두 곳은 따로 입장권을 사야 들어갈 수 있고, 세 번째 경기장이라 할 수 있는 마거릿 코트 아레나(Margaret Court Arena)부터 쇼 코트(Show Court)부터 20개에 가까운 작은 코트에서 열리는 경기는 그라운드 패스라 불리는 멜번 파크의 입장권과 같은 티켓을 사서 들어갈 수 있다. 로드 레이버 아레나 또는 하이센스 아레나의 입장권을 구입하면 이 티켓에 그라운드 패스가 포함되어 있는 셈이라 자신이 구입한 경기장과 그라운드 패스만으로 관전이 가능한 다른 경기장에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하다. 물론 작은 코트 중에는 관중들이 관람할 만한 공간이 충분하지는 않다.

11시부터 바로 여자부 준결승 경기가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남자 복식 결승 경기에 이어서 여자 준결승 두 경기가 하나의 세션으로 되어 있었다. 만약 복식 경기가 먼저 열리는 것을 알았더라면 천천히 걸어왔을텐데 괜히 비싼 택시를 탄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남자 복식 준결승 1경기가 열린 후 여자 단식 준결승 두 경기가 이어지는데, 앞의 경기가 일찍 끝나더라도 오후 2시 이전에 경기를 시작하지는 않는다고.. 야잇 18.

대회 시작 전에 미리 구입한 티켓임에도 자리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티켓 판매를 하는 티켓텍 지점에서 좌석 배치표를 보면서 심각하게 고민한 후 고른 자리인데, 이는 호주오픈 티켓 중 많은 좋은 좌석은 기업용 혹은 여행사 상품용으로 팔리기 때문에 어지간해서 일반인이 좋은 자리를 구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좋아하는 선수의 경기를 볼 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면 되겠지만 사실은 샤라포바가 아닌 페더러 경기를 보고 싶었다고!!


경기장에 스타 플레이어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당시에 가장 잘 나가던 로저 페더러.


페더러의 천적이었던 라파엘 나달

그러나 이 대회까지만 해도 클레이코트에서만 위용을 뽐내던 선수였다.


기운 센 천하장사 서리나(Serena) 누님


전년도 우승자의 서리나 누나의 모습


남자부는 황제 페더러가 대회 3연패에 도전하는 상황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레이튼 휴잇은 다른 세 명 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레벨이지만 호주 선수라고 끼워준 것 같다.


곧 경기에서 보게 될 마리아 샤라포바.

작년에 약물복용으로 2년간 출전 정지를 당해서 당분간 보기 힘들 것 같은데, 나이가 있어서 글쎄 어찌 될 지는..


로드 레이버 아레나로 들어갔다.


흐린 날씨라 그런지 비가 올까봐 지붕을 다 열어두지는 않은 것 같다.

전광판을 보니 샤라포바가 나오는 여자 단식 준결승 경기가 아닌 남자 복식 준결승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톱시드였던 남자 복식계의 전설 브라이언 브라더스가 8강에서 격침당하고, 모르는 선수들이 경기를 하고 있어서인지 몰입이 잘 안 되었다. 프랑스의 미카엘 요다와 아르노 클레망이 승리해서 결승에 진출했다.  


복식 경기는 거의 안 봐서 잘 모르기도 하고 9년 넘게 지나서 누가 누구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볼보이 또는 볼걸들이 있다.

기아자동차가 호주오픈의 메인스폰서 업체여서 한국 아이들도 선발하여 호주오픈의 볼키즈로 활약을 한단다. 주요 경기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워낙 많은 경기가 열리니 여러 곳에서 활약을 했겠지 싶다. 나는 기아자동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이긴 팀이나 진 팀이나 꺼꾸리와 장다리 조합이었는데 모르는 선수들이라 그런 것도 있고, 이미 경기가 어느 정도 진행 중이어서인지 별로 재미를 붙이지는 못했는데 다행히 금방 끝났다. 선수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이 날은 남자복식 준결승 한 경기와 여자단식 준결승 두 경기, 그리고 남자단식 준결승 한 경기가 이 곳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열린다. 내가 산 데이 세션으로는 여자단식 준결승 경기까지만 볼 수 있고, 멜번 파크 안의 다른 코트에서 열리는 경기를 볼 수 있는데 대회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어서 열리는 경기가 많지 않아서 별 의미는 없었다. 악쟁이 샤라포바와 이번에 경기를 보면서 빠져든 이바노비치의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누군지 잘 모르지만 얘네들이 이겼다.


곧 열리는 경기는 샤라포바와 옐레나 얀코비치의 여자 단식 준결승 제 1경기

경기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여자 준결승전이 시작하는 2시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남아서 비싸지만 경기장 내의 매점에서 핫도그를 사서 먹고 멜번 파크 한 바퀴 돌면서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돌아다니다 보니 샤라포바의 모습이 담긴 광고판도 있다.


이 때 확실히 나이키에서 샤라포바에게 엄청난 푸쉬를 했는데 지금은 뭐.. 약물복용자.


아무래도 평일 낮이기도 하고 나이트 세션에 라파엘 나달의 준결승 경기가 있으니 사람들이 그 경기를 많이 보러 가겠지 싶다. 대낮에 이렇게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나 같은 땡땡이 친 학생, 돈 많은 백수, 열렬한 테니스 애호가 정도겠지.


샤라포바와 맞붙게 된 세르비아의 옐레나 얀코비치. 5번 시드를 받은 샤라포바보다 더 높은 3번 시드를 받았는데, 이 해에 다른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 속에 세계랭킹 1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메이저 대회 우승 타이틀 하나 없다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0년 즈음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은 못하더라도 4강 정도에 오르는 꾸준한 포인트 관리로 세계랭킹은 높았으나 이후에 부상이 오면서 추락한 케이스. 그래도 최근까지도 계속 선수 생활은 하고 있다는 것 같다. 요즘에는 내가 테니스를 챙겨볼 정도의 여유가 없어서..


경기 전에 입고 오는 트레이너도 다른 선수들처럼 흔한 운동복 모양이 아니다.


팔다리가 길기는 길다. 키가 188cm라고 하니 이건 뭐..

아씨.. 나는 루저..


막상 실제로 보니 특별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데 샤라포바를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흥미롭게 보는 선수라서 그런가보다.


관중석 아래쪽에 빈 자리가 있어서 사진을 찍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심판 언니보다 머리 하나 더 높구나..



귀국

2017. 3. 12. 16:55

눈을 떴는데 아침식사, 체크아웃, 택배 발송이라는 과제가 있어서 평소처럼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텔레비전을 보는 여유는 부리지 못하고 서둘러 일어나 씻고 옷을 입은 뒤에 아침을 먹으러 로비로 내려갔다. 


숙박객 대상 "무료" 아침식사

이 호텔 체인에 아주 뛰어난 시설과 서비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혼자서 방에 들어가서 씻고 자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부담없이 할 수 있고, 포인트를 쌓아서 무료 숙박을 할 수 있어서 코가 꿰인 마냥 가급적 이 체인을 이용하고 있다. 2015년부터 여러 이유로 일본에 드나들면서 적지 않은 포인트를 쌓아서 돈 없어도 일주일 이상 묵을 수 있는 포인트가 쌓여 있다는.. 환율이 오르면 그 때 사용하려고 고이 간직하고 있다.

밥을 먹고 커피 한 잔 마신 후 방으로 돌아와 씻고 짐을 챙긴 뒤에 로비에 가서 인쇄를 몇 장 한 뒤 체크아웃을 하면서 잠시 짐을 맡겨 두고 우체국에 다녀왔다. 어딘가에서 우체국을 본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한참 헤매다가 겨우 찾아서 갔다. 미리 구글 지도를 켜놓고 갔어야 하는데, 그 흔하디 흔한 우체국이 이렇게 안 보일 줄이야.. 우체국에 도착한 뒤에 화물의 크기에 따라 비용이 달라지므로 최대한 줄여서 가장 작은 60사이즈에 맞추느라 들고 간 상자를 잘라서 사이즈를 줄여서 새로 만드느라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보낼 것은 보냈으니 짐을 찾아서 다시 호텔로 걸어서 돌아가는데 날씨가 좋아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설렁설렁 걸어서 돌아갔다. 다만 거리가 생각보다 멀고, 중간에 헤맨 덕분에 오전을 다 잡아먹었다. 호텔에서 늦게 나오기는 했지만 공항까지 갈 시간이 촉박해지는 것 같아서 조금씩 급해지기 시작했다.


별 의미 없이 그냥 건물 유리창에 비친 송신탑의 그림자를 한 번 찍어봤다.

호텔로 돌아가서 맡겨두었던 짐을 찾아 나온 뒤에 사카에역으로 걸어갔다. 신사카에마치역이 가장 가까운 역이지만, 사카에역으로 가면서 맑은 날에 산책을 조금 더 하면서 기분 전환을 위해서. 아직 꽃이 필 시기는 아니지만 길 가운데에 꽃들이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키워서 심어놓은 것일까.


지난 밤에 찍은 사진은 엉망이었는데, 밝은 대낮이라 사진이 깔끔하게 나온다.


겨울이라 쌀쌀한데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고야역까지 걸어가고 싶었으나, 이미 나고야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체국까지 다녀온데다 짐이 있으니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서 사카에역에 지하철을 타러 갔다. 사카에역에서 나고야역까지는 역 두 개의 거리이지만 다음 역인 후시미에서 나고야역까지의 역 간 거리가 좀 긴 편이라 돌아가는 마당에 고생하고 싶지는 않고. 

 

지하철 승차권. 사카에에서 나고야까지는 200엔.

일본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지하철 요금은 저렴하다..

일본에는 노인들에 대한 지하철 무임승차제도가 없다. 한국에서 실시하는 만 65세 이상 지하철 무임승차제도의 의의는 좋게 평가하지만, 갈수록 노인은 늘어나고 청장년층의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이 제도가 이어질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일정 횟수 정도 이용할 수 있는 바우처를 배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유권자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정치인들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재정적인 문제보다도 내가 이 제도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의 사람들만 이 혜택을 보는 역차별적이고, 상대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부유하기에 소득 역진적인 복지혜택이라는 점이다. 시골에는 지하철이 아예 없을 뿐 아니라,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교통 소외지역이 많은데 이런 곳에 지원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인지 어느 누구도 감히 이야기를 못하는 것 같다. 노인들이 투표를 열심히 해서 그럴까..


나고야역 지하상가

지하철을 타면 단 5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인 나고야역에 도착했다. 지난 이틀 동안 이 거리를 걸어서 두 번 왕복을 했는데, 덕분에 나고야역에서 사카에까지 걸어가는 길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 두 달 전에는 어디가 어디인지 가물가물해서 계속 헤매면서 바보짓을 했는데, 이제 별 어려움 없이 사카에까지 갈 수 있을 듯하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나고야역 지하 상점가를 돌아다니다가 JR나고야역에 있는 서점에서 잡지 한 권을 사고, 메이테츠 나고야역으로 갔다. 토쿄나 오사카는 JR과 사철이 경쟁하는 구조인데 나고야는 메이테츠의 독점 노선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스위트 2016. 2월호. 사실 내용이 중요해서 산 것은 아니고.. 표지모델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할 일도 없어서 바로 메이테츠나고야역으로 들어갔다. 메이테츠나고야역은 이 회사의 중심역임에도 불구하고, 3면 2선의 최악의 구조를 자랑한다. 가운데에 섬처럼 있는 승강장은 하차 전용으로 사용되며, 승차는 양쪽 끝에 있는 승강장에서 한다. 위의 사진에서 멀리 있는 승강장은 기후 방면, 즉 서쪽으로 가는 노선이고, 기다리고 있는 승강장은 토요하시 방면의 동쪽으로 가는 노선이다. 나고야역에서 츄부국제공항에 갈 때는 토요하시 방면의 나고야본선을 따라 진구마에(神宮前)역까지 가서 토코나메선으로 분기하여 토코나메까지, 그리고 토코나메에서 쿠코선(空港線. 공항선)으로 이동한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뮤스카이가 아닌 특급열차를 타고 가도 무방해서 그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360엔 아껴서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어야지..


토코나메역을 지나면 열차는 바다를 건너게 된다. 진행방향 왼쪽으로 공항은 아니고 물류업체 건물이 있고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호텔이 있다. 오른쪽에는 활주로가 있는데 사진을 안 찍었다. 내려서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국제선 터미널로 직진해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맡기고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것 밖에..


여기서 그녀를 다시 보게 되는군.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그냥 탑승수속을 빠르게 진행한 뒤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렸다. 빨리 집에 가고 싶으나 비행기는 정시에 출발을 해서 뭐..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이륙을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날아올랐다.


교토에서 배달시킨 상품 하나를 받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 분실물이나 쓸데없이 쓴 돈이 없어서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던 닷새였다. 남들이 "그래서 무엇을 했는데?" 라고 하면 딱히 답하기 어려운 것이 뭐 그렇지만.. 이 기간 중에 보고 느낀 것 모두 세세하게 밝히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공항철도와 버스를 타고 평소 퇴근시간보다 빨리 집에 도착했다. 기쁘다.


<The End>

9시가 조금 못 되어 눈을 떴는데, 호텔에서 아침밥을 무료(라고는 하지만 숙박비에 포함되었겠지)로 주니 옷을 걸쳐 입고 적당히 머리를 손질한 뒤 1층으로 내려갔다. 평소에는 아침잠이 많아서 아침에는 끼니를 거르고 점심, 저녁을 먹고 밤에 돌아와서 야식을 먹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는데, 집을 떠나면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챙겨먹고 그걸로 모자라 밤에 또 뭔가를 먹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에너지가 많아서인지 돌아온 뒤에 보면 살이 빠져 있다. 요즘에는 그다지 낯설지도 않고, 현지인들도 외국인이라는 것을 거의 알아채지 못해서 부담없이 다니기는 하는데,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지내기 때문인 것 같다.

밥을 먹고 방으로 올라와서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해야할 일이 생각나서 잠깐 하다가 귀찮다고 침대 위에 쓰러지기를 반복하다가 그래도 해외에 있는데 마냥 일만 하기는 아까우니 적당히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을 겸해서 나고야역으로 슬슬 걸어갔다. 두 달 전에 나고야에 왔을 때 길을 한참 헤맸던 것이 생각나서 사카에에서 나고야역까지 가는 길을 확실히 알아두기 위해서.

밥돌이니까 밥을 먹어야겠는데, 나고야의 3대 명물인 히츠마부시와 키시멘, 그리고 미소카츠는 이미 모두 클리어를 하였지만, 두 달 전에 먹었던 미소카츠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미소카츠로 가장 유명한 야바톤에 가보기로 했다. 그 때 역시 야바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어서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에 맞지 않았고, 얼마 되지 않은 현금으로 식비를 계산하려다보니 야바톤의 음식 가격이 가진 돈을 넘어서서 저렴하고 사람이 적은 다른 곳에 가서 먹었던 미소카츠가 독특한 맛이어서 원조라는 곳은 어떤가 궁금했다. 

야바톤은 나고야 시내의 여러 곳에 매장이 있는데, 본점은 이름처럼 야바쵸(矢場町)에 있고, 사카에에도 있고, 나고야역 에스카와 메이테츠나고야역 등 나고야 시내 여러 곳과 츄부국제공항, 그리고 토쿄, 오사카, 토야마 등에 지점이 있다고 한다. 만만한 곳이 나고야역 지하 에스카라서 그 곳으로 갔다.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기다리기 싫어서 그냥 지나쳤던 곳인데, 점심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이 많은 시간대가 아니었던 덕분인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빈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일행이 아닌 경우는 다른 테이블에 앉도록 하니 잠시 기다리다가 곧 카운터 쪽에 자리가 있어 들어가 앉았다.


일단 젓가락과 물수건이 나온다.


야바톤의 등록상표라는 돼지 녀석이 물수건과 젓가락 포장에 그려져 있다.


단순히 미소카츠만 달라고 하면 되는게 아닌가 싶어 와라지돈카츠정식을 시켰는데 엥~ 미소카츠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소스를 어떻게 뿌려서 가져올지 물어봤던 것 같은데 반만 뿌려달라고 했더니 그런 모양이다. 전부 미소소스가 뿌려진 미소카츠를 시켰을 때 그 소스가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들기도 했고, 미소소스를 뿌리지 않은 돈가스의 맛은 어떤지 궁금해서였는데.. 그러면 나머지는 미소카츠여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는데, 입안에 밥과 고기덩어리가 있어서 다 먹을 때까지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곧 궁금했던 것은 점원의 재등장과 함께 해결되었다.


아래에만 보통의 돈가스[각주:1] 소스가 뿌려져 있는데, 점원이 미소카츠 소스는 따로 가져다 뿌려준다. 정확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소스를 미리 뿌리면 튀김옷이 눅눅해지니까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미 아랫줄의 미소소스를 뿌리지 않은 돈가스는 절반이 넘게 사라진 뒤고..

미소소스는 짭쪼롬하면서 달콤하여 묘한 매력이 있다.


돈가스 외에도 여러 기념품들도 판매하고 있다.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어서 그냥 보기만 하고 돌아섰다.


직업병이 도져서 비쿠카메라에 들러 구경을 잠시 하다가 다시 나고야역으로 가서 열차를 타고 어딘가에 가기로 한다. 킨테츠레일패스가 있으니 따로 돈을 안 내고 킨테츠 노선을 타고 갈 수 있으니 급행열차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리가 넉넉한 각역정차 보통열차를 타고 간다. 철덕은 아니라서 각 역의 명판의 사진을 찍지는 않고, 평소에 특급열차를 타고 무심코 지나쳤던 지역을 슬슬 둘러보기로.

그래도 나고야가 88년 서울과 올림픽 유치를 위해 경쟁했던 곳이기도 하고, 일본의 4대 도시 중의 하나인데 찾아보면 가보지 않았던 곳이 있을테니 갈 곳이 없겠냐마는 배가 부르니 움직이기는 싫고, 그래도 겨울이라고 쌀쌀해서 난방이 되는 열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택했다.


해가 짧은 겨울이라 욧카이치에 도착하니 슬슬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다시 직업병이 도져서 역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야마다덴키 매장까지 걸어가서 둘러보고 떨이로 싸게 파는 것을 몇 개 사고, 동네 한 바퀴 구경을 했다. 대로변은 멀쩡하지만 중심부에서 벗어난 작은 길들은 군데군데 눈이 쌓인 채 얼어있어서 길가다가 넘어질 뻔했는데 듣던대로 역 바로 앞에만 상가들이 있는 츠에 비해서 상점들이 많고 번화한 것으로 봐서 이 동네가 미에현의 경제 중심지인 것 같다. 실제로 이 지역에 일본의 화학기업 공장들이 있기도 하고.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이 동네에 와서 야마다덴키에 들어가 제품 구경을 하느라 보낸 시간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보낸 것 같다.


애니메이션바, 건담바라고 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는 분야라서..

 어느새 어둠이 깔려서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오프에 가서 만화책이나 잡지 같은 것을 보거나 희귀템을 찾는 재미가 있는데 역에서 멀어서 포기했다. 


철도와 크루즈 연계 관광상품인가보다. 포스터에서 보이듯이 욧카이치는 공업도시, 그것도 종합석유공업단지가 있다. 1959년부터 이 공업단지가 본격적으로 가동이 되면서 이산화황, 이산화질소, 포름알데히드 등 이름만 들어도 심각하게 느껴지는 대기오염물질이 배출되기 시작하였고, 주민들이 이 오염으로 인한 질병을 호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천식 환자들이 많았는데, 욧카이치에서 갑자기 이 환자들이 대거 발생하자 '욧카이치 천식'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욧카이치시에서는 천식 환자들이 늘어난 것의 원인으로 공장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로 인한 대기오염이라고 밝혔으나 공장 가동은 계속되었고,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하다 10년이 넘게 지난 뒤에서야 법을 새로 제정하여 이들에 대하여 오염을 유발하는 기업과 정부가 보상하도록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지금의 욧카이치는 사람이 사는데 별 문제가 없으니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밤이 되니 쌀쌀해지기도 하고, 귀국이 다음 날이니 일찍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역 건물 안에 있는 마츠모토키요시에서 가장 싼 녹차 한 병을 사서 열차를 타고 다시 나고야로 돌아왔다. 


나고야에서 라멘마츠리가 열린다고 하는데, 라멘은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기도 하고, 2월 10일이면 한국에서 명절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여서..


나고야 TV타워(テレビ搭) 

배터리를 충전하지 못한 카메라를 따로 들고 오지 않아서 폰카로 찍었더니 엉망이다. 1954년에 준공되어 높이는 180m이고, 일본에서는 방송탑과 전망대 기능을 동시에 하는 최초의 철탑이라고 한다. 첫 일본여행에서 이 타워 전망대에 올라간 적이 있는데, 야경이 그렇게 아름답거나 볼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던 기억이 있어 이후 수 차례 나고야에 들렀지만 다시 가본 적은 없다.


폰카의 한계인지 줌을 사용하니 사진이 더욱 못쓰게 된다. 


나고야역에 내렸을 때 타카시마야 식품매장에서 저녁으로 먹을 치라시스시 도시락 2팩를 사가지고 왔다. 

개당 300엔씩 할인을 했던 것 같은데..


연어알게살덮밥


먹음직스럽다..


이어서 연어알 대신 연어사시미가 든 비슷한 도시락


식당에서 먹었으면 비쌌을텐데..

아마도 아래의 녀석이 더 비쌌던 것 같은데 마감시간이라고 개당 300엔씩 할인해서 도시락 두 개를 896엔에 샀다. 신선식품이라서 당일에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싸게 파는 것이겠지만, 처음의 판매가를 나중에 이렇게 할인해서 팔 것까지 감안해서 손해보지 않도록 설정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갓 만들어 나온 것보다는 신선도는 조금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값싸게 먹은 것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씻은 뒤에 대충 짐을 싸놓고 잠을 청했다.

  1. 돈가스가 국어 표준 표기법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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